디자이너 김재현(46)에게도 삶의 굴곡이 있을까. 2001년 데뷔하자마자 금세 톱 디자이너 반열에 오른 그다. 그가 만든 브랜드 '쟈뎅 드 슈에뜨'는 2005년 론칭하자마자 매년 200%씩 성장했고, 2012년부턴 F&C와 손잡고 해외 진출도 모색 중이다. 김재현은 그러나 "나 역시 나름 비딱하게 사느라 힘들었다"며 웃었다.

"남자들은 대개 여자에게 두 가지 모습만 요구한다. 성녀(聖女)거나 요부(妖婦)이거나. 우리나라 여성복도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보통 두 가지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단정하거나 관능적이거나. 둘 다 싫었다. 그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기왕이면 다른 옷을 만들고 싶었다. 그 싹을 록 가수들이나 입을 것 같은 라이더 재킷(Rider jacket·오토바이 족이 주로 걸치는 재킷)에서 찾았다. 여자들은 잘 입지 않는 옷. 그래서 더 매혹적인 옷…." 말을 마친 김재현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번득였다.

노는 여자, '남자 옷'에 도전하다

김재현은 어릴 때부터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방직회사에 다녔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원단을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공부엔 큰 관심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도 바지통이 넓으면 재봉틀을 돌려 직접 줄여 입었고, 마음에 드는 옷이 없는 날엔 외국 잡지를 뒤적이며 집에 있는 옷을 손바느질로 고쳐 입었다. 잡지에서 오토바이 족이나 걸칠 법한 두툼하고 단단한 라이더 재킷을 발견했다. 그 순간 "이 옷이야!"라고 외쳤다.

인⃝1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매장에서 만난 디자이너 김재현은 라이더 재킷이 걸린 마네킹을 휘어잡고 카메라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마치 록 가수처럼.

"여자가 입는 옷이 아니다"고 주위에서 한마디씩 했지만 상관없었다. 용돈을 열심히 모아 오토바이 회사 할리 데이비드슨에서 파는 라이더 재킷을 처음으로 샀다. 몸엔 지나치게 컸지만 그래도 좋았다. 매일 입고 다녔다. 인디언 모터사이클에서 파는 거친 라이더 재킷도 샀다. 남자 친구들은 "왜 그런 옷을 입느냐"고 물었다. 김재현은 "그때마다 '너희 보라고 입는 게 아니야. 내가 좋아서 입는 거지'라고 대꾸할 수 있어서 좋았다"며 웃었다.

1987년 이화여대 조소과에 들어갔다. 진득하게 붙어 앉아 작품을 만드는 건 김재현 스타일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밤새 놀며 입을 옷을 손바느질로 고쳐 입기에 바빴다. 프랑스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났지만 생활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위에선 "차라리 옷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파리 의상학교 '에스모드(Paris Esmod)'에 들어갔다. 패턴을 만들고 옷을 재단하는 걸 처음 배웠다. 1995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김재현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해낸 일"이라며 웃었다.

여우도 곰도 아닌, 올빼미 같은

2001년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작은 가게를 냈다. 라이더 재킷과 턱시도 수트, 반듯한 정장 바지를 걸었다. 모두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기본기가 탄탄한 옷이었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라이더 재킷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시중엔 김재현의 옷을 베낀 모사품이 숱하게 나돌았다. 김재현은 "대중도 어쩌면 기존 여성복에 염증을 느꼈던 것 같다"고 했다.

2013년 봄·여름 컬렉션(사진 왼쪽)과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던 25세 무렵의 김재현.“이때도 매일 라이더 재킷을 입고 다녔다”고 했다.

2005년엔 '쟈뎅 드 슈에뜨(jardin de chouette)'라는 이름으로 브랜드를 론칭했다. '올빼미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김재현은 "올빼미는 낯설고도 지혜로운 동물이다. 밤에 노는 동물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뭐랄까, 이 역시 여우도 곰도 아닌 전혀 다른 여성을 연상시켰다"고 했다.

징과 별, 해골 장식이 난무하는 김재현의 라이더 재킷. 그렇지만 무척이나 여성스럽고, 덕분에 매년 베스트셀러가 된다. 김재현은 "제3의 여성성을 그렇게 남성복에서 찾았고, 그 옷을 기반으로 당당한 여성의 옷을 창조했다. 참 여러모로 아이러니 아니냐"고 했다.

작년엔 '럭키 슈에뜨'라는 이름으로 세컨드 브랜드를 냈다. 요즘도 그가 출시하는 한정판 옷과 가방을 사기 위해 지방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와 길게 줄을 선다. 김재현은 "이제 여성용 라이더 재킷을 만드는 회사만 수백 곳이 됐지만 그래도 아직 내가 원조라는 말을 듣기에 계속 옷을 만든다"고 했다.

"앞으로도 '놀 줄 아는 여자'를 위해 옷을 만들고 싶다. 굳이 남자를 의식할 필요 없는 여자, 일과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여자. 내 옷은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