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멧(helmet);①쇠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충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쓰는 투구 모양의 모자(오토바이를 탈 때 쓰거나 공사장의 노동자들이 씀.) 안전모. ②서양식 투구 모양의 모자. 여름철이나 열대지방을 여행할 때 씀.(동아 국어사전)
사전의 정의대로 헬멧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쓰는 모자다. 야구장에서도 타자들은 타격 시 헬멧을 쓴다. 그런데 타자 뿐 만 아니라 예전엔 외야 수비수들도 헬멧을 쓴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각 구단의 1루 주루코치들도 자기 팀 공격 때면 헬멧을 쓰고 1루 코처스 박스에 나간다.
머리 보호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외부 충격’의 상황은 다르다.
1996년 준플레이오프 대전구장의 '꼴불견'
그 해 10월 1일 대전구장에서 열렸던 현대 유니콘스-한화 이글스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경기 중반부터 관중 난동과 그라운드로 날아든 빈병, 깡통으로 얼룩졌다.
경기 시작 30분 전, 한화 구단 관계자들은 입장권 매진 소식을 알리며 기대에 들떠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정규리그서는 단 한 차례도 만원사례를 내걸지 못했던 터여서 그럴 만도 했다. 3위 한화와 4위 현대의 다툼이었기에 한화 팬들의 성적에 대한 기대 또한 당연했다.
한화 선수단 속사정은 달랐다. 1차전 선발로 내정돼 있던 투수부문 4관왕(다승, 평균자책점, 구원, 승률)이자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였던 구대성이 경기 직전 허리통증을 호소, 등판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훈련을 정상적으로 소화했던 그였기에 한화 코칭스태프의 당혹감은 컸다.
그야 어쨌든, 경기 초반 한화 팬들은 신바람 나는 응원 행진으로 흥겨워했으나 5회 들어 한화 선발 정민철이 난조, 대거 5실점해 0-6으로 전망이 어두워지자 낙담, 돌변했다. 살벌해진 스탠드 곳곳에서 한화 팬들이 3루 쪽 현대 응원석을 에워싸고 몸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그라운드로 빈병과 깡통이 마구 날아들었다.
오물 세례는 7회에 한화가 추가 3실점 하자 절정을 이뤄 우박처럼 그라운드로 쏟아졌다. 급기야 경기가 몇 차례 중단됐다. 술에 취한 한 관중은 경기 도중 현대 덕 아웃에 들어가 소동을 부리다가 끌려 나가는 일도 있었다. 급기야 9회 말 현대 우익수 김인호가 관중이 던진 빈병에 얻어맞는 사태가 벌어졌다.
도저히 정상적인 수비가 어려워지자 현대는 김인호와 박재홍, 이희성 등 외야수들에게 헬멧을 쓰게 하고 다시 수비에 들어가는 한심스러운 장면도 연출됐다. 청명한 가을 저녁, 식구들끼리 야구장 나들이를 나왔던 관중들은 눈꼴 사나운 장면을 보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한화는 그 경기에서 0-15로 대패했다.
상대편 응원관중들의 외야 수비수들에 대한 표적 팔매질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한국 프로야구의 '슬픈 얼굴'이었다.
코치 헬멧의 원조 김평호 KIA 주루코치
관중 난동에 대비한 외야수들의 '헬맷 수비'와는 달리 코치 가운데에서도 헬멧을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헬멧 코치'의 원조는 김평호(50) KIA 타이거즈 주루코치이다.
김평호 코치는 지난 2007년 삼성 라이온즈 주루코치 시절 팀 공격 때 헬멧을 쓰고 1루 코처스 박스에 나가기 시작했다. 타자들의 강한 타구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이크 쿨바가 1루 코처스 박스에 서 있다가 타구에 맞아 사망한 사건도 계기가 됐다.
김평호 코치는 자신이 헬멧을 쓰게 된 경위를 이렇게 풀어 놓았다.
“지난 2003년 두산에 코치로 있을 때 예전에 현대의 외국인 선수 스캇 쿨바의 친동생인 마이크 쿨바와 함께 생활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마이크 쿨바가 2007년 마이너리그 콜로라도 록키스 1루 주루코치로 나갔다가 타구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 이후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지시를 내려 1루 주루 코치에게 헬멧을 쓰게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다시 그런 일이 안 생기라는 법이 없으니까. 1루 주루 코치만 18년째인데, 항상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구 때문에 위험을 많이 느꼈다. 저 뿐 만 아니라 다른 코치들도 느끼고 있다. 삼성에 있을 때 1년 후배인 류중일 감독(당시 3루 작전코치)에게 ‘류 코치, 사람이 죽었는데 솔직히 위협감 느끼지 않나. 같이 헬멧을 쓰자’고 권유했다. 구단에 부탁해서 저는 쓰고 나갔는데 류중일 코치는 쑥스럽다며 안 썼다.”
현재 1루 주루코치의 헬멧 착용은 의무화 돼 있다. 김평호 코치가 코치로선 맨 처음에 시작, 그 점에선 선구자였던 셈이다.
김 코치는 “헬멧을 쓰고 나선지 얼마 지나 당시 김응룡 삼성 사장님이 ‘혼자 헬멧을 쓰고 다니며 튀는 행동을 하느냐’는 말씀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잠시 중단했던 적도 있었다”며 웃었다.
김평호 코치는 선수시절에도 외야수비 때 헬멧을 쓰고 나간 기억이 제법 있다.
“프로야구 초창기 때엔 헬멧을 쓰고 수비해 본적이 있다. 1986~1989년 사이에 해태에서 뛸 때 원정 경기 때에는 헬멧을 자주 썼다. 홈 관중들이 그런 적은 별로 없지만 그 때도 턱도 없이 지면 난동 나고 그랬던 시절이었다.”고 돌아보았다.
마이크 쿨바의 사망으로 1루 코치 헬멧 착용 의무화
앞서 언급했다시피 현재 한국 뿐 만아니라 일본이나 메이저리그의 1루 주루코치는 헬멧을 반드시 쓰고 1루 코처스 박스에 나가야 한다.
마이크 쿨바의 사망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콜로라도 록키스 산하 더블A 툴사 드릴러스 코치로 일하던 마이크 쿨바는 2007년 7월 23일(한국시간)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열린 아칸소 트래블러스와 원정경기에서 9회에 1루 쪽 코처스 박스에 있다가 드릴러스의 지명타자 티노 산체스가 친 총알 같은 강한 파울 타구에 머리를 강타당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
당시 35살의 젊은 나이였던 쿨바는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있었고 아내의 뱃속에는 곧 태어날 셋째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도 주위에 알려져 더욱 안타깝게 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정금조 운영부장에 따르면 2009년 제 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마친 뒤 한국 프로야구도 논의 끝에 1루 주루코치의 헬멧 착용을 의무화했다.
정금조 부장은 “미국이 사고(쿨바의 사망)가 난 후 먼저 아마추어 경기부터 시행했고, 2009년 WBC때부터 위험성을 감안해 의무화했다.”면서 “우리는 2009년 WBC 코치진을 뽑아놓고 당시 나이키사에 (헬멧을) 주문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프로야구에 도입한 경위에 대해 정 부장은 “명문화 돼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2009년 WBC 후에 실행위원회(구단 단장 모임)에 보고, 의무화 시켜야겠다고 협조를 요청했다. 단장회의 결과로 확정했다. 준법제화 한 셈이다”고 설명했다.
/홍윤표 OSEN 선임기자
1996년 10월 1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현대 외야수 박재홍(오른쪽)과 이희성이 헬멧을 들고 외야로 나가고 있는 모습.(제공=일간스포츠)
'코치 헬멧의 원조' 김평호 KIA 코치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