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있었고 약간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다…나는 자연을 꿰뚫는 거대한 절규를 들었다."
'절규(1893)'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노르웨이)가 탄생 150주년을 맞았다.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실연의 내상(內傷)을 강렬한 색채로 뭉개고, 개인의 고독을 형태 왜곡으로 극대화한 이 예술가를 위해 오슬로 시내 곳곳엔 탄생 150주년을 알리는 노란 현수막이 걸렸고 지난 2월 노르웨이 우체국은 5종의 기념우표를 발간했다. 올해 예정된 뭉크 관련 기념행사는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것만 50여개에 이른다.
백미(白眉)는 6월 2일부터 10월 13일까지 열리는 '뭉크 150' 전시회. 작품 271점 중 생애 전반기(1882~1904년) 것과 후반기(~1944년) 것으로 나뉘어 오슬로 국립미술관과 뭉크미술관 두 곳에서 전시된다.
개막일인 지난 2일 오전 오슬로엔 비가 내렸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처음 맞이하는 건 청년 뭉크의 첫 '자화상(1882)'. 밝은 갈색톤의 얼굴빛과 섬세하게 그려낸 눈·코·입, 그가 구사한 해부학적이고 정직한 화법(畵法)이었다. 그러나 보헤미안 지식인들과 어울리면서 그의 그림은 급격히 달라진다. '팔뼈가 있는 자화상(1895)', '지옥에서의 자화상(1903)'에서 그는 피부가 아닌 피하(皮下)를 보여준다. 그에게 중요한 건 외관이 아니라 주관이었다. '절규(1893)'가 가장 대표적인 예. 과장되게 벌어진 눈과 입, 성(性)도 나이도 알 수 없이 단순화된 인물은 토사물처럼 출렁이는 배경 속에서 극도의 혼란을 노출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노르웨이 여성 아빈즈(45·사진가)는 "그림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어 더욱 불편하다"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1868년 뭉크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9년 뒤엔 한 살 터울의 누나가 결핵으로 죽었다. 1889년엔 신경 쇠약을 앓던 아버지가 자살했다. 뭉크는 허약했고, 류머티즘·기관지염·불면증을 앓았다. '절망(1892)', '죽음의 냄새(1895)' 등은 그가 앓았던 불안과 공포, 우울의 증거다. "내 예술은 가라앉는 배에서 무전 전신 기사가 보내는 경고와 같다… 삶의 두려움과 병이 없었다면 나는 키(타·舵) 잃은 배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며 살아낼 수 있었다.
오전 11시 50분. 뭉크미술관에 쏟아지던 비가 거대한 울음으로 뒤바뀐 건 그 무렵이었다. 곧 천둥이 이어졌다. 뭉크에게 여성은 고통의 동의어(同意語)였다. 후원자의 형수였던 첫사랑 밀리 탈로, 두 번째 연인 툴라 라르센과의 연애가 파국(破局)을 맞으면서 그의 여성관은 비뚤어진다. 뭉크의 그림에서 여성은 '뱀파이어(1893)'나 '마돈나(1895)'에서처럼 강한 성적 마력을 통해 남성을 파괴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특히 1902년 툴라는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난동을 부렸고, 이때 권총이 잘못 발사돼 탄환은 뭉크의 왼손 중지(中指)를 관통했다. 이후 그의 여성 혐오는 극에 달한다. 뭉크는 '마라의 죽음(1907)'에서도 피 흘리며 죽어 있는 사내와 선 채로 정면을 응시하는 여자를 대비시키며 여성에게 '파멸'의 이미지를 입힌다.
1944년 1월 그는 오슬로 근교 에켈리에서 8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내가 죽고, 몸이 썩으면 그 위에 꽃이 피고 나는 꽃들과 함께할 것이다." 그가 태어난 지 100년 뒤 오슬로에 뭉크미술관이 들어섰고, 지난달 제2의 뭉크미술관 착공 계획이 발표됐다. 이날 하루 동안에만 3300여명이 전시장을 다녀갔다. 비는 오후에 그쳤다.
☞뭉크
1863년 노르웨이 동부 뢰텐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공업학교에 입학하지만 화가가 되기 위해 그만두고 1881년 오슬로의 미술공예학교에 들어갔다. 1882년부턴 보헤미안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공부했다. 대표작은 '절규', '뱀파이어', '사춘기', '마돈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