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 '쉐프'(The Chef 다니엘 코헨 감독)는 요리사 세계의 드라마를 영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입니다. 미식(美食)의 종주국에서 만든 요리 영화답게 맛을 창조하려는 요리사들 세계를 흥미롭게 파고듭니다.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건 요리사들 간 경쟁과 서바이벌의 드라마입니다. 세상에서 더 인정받는 요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 팽팽하게 각축하고, 때론 부딪칩니다. 그 이야기란 요리 세계뿐 아니라 세상 여러 분야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각축에 관한 은유로도 읽힙니다.
극중 요리 분야의 중진급이라 할 저명한 쉐프 '알렉상드르'(장 르노)가 겪게 되는 곤경이 간단찮은 울림을 줍니다. 알렉상드르는 세계 미식가들의 바이블이라 불린다는 '미슐랭 가이드' 로부터 별점 3개 만점을 받은 세계최고 레스토랑을 만든 장인입니다. 그런데 젊은 레스토랑 사장은 알렉상드르의 요리가 너무 '올드'하다며 그를 쉐프 자리에서 내쫓으려 합니다.
사장은 "요리의 새로움이 없다. 100년은 뒤쳐졌다"고 불만을 털어놓지만, 이유가 사실 이것만은 아닙니다. "값싼 냉동식품으로 요리를 만들어 이윤 좀 늘리자"는 요구 따위에 콧방귀도 안 뀌는 알렉상드르가 사장에겐 눈엣 가시 같은 것입니다.
알렉상드르는 시즌에 맞는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지 않으면 수십 년 이름 날려온 레스토랑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입니다. 그런 그의 시야에 천재적인 젊은 요리사 자키(미카엘 윤)가 들어옵니다. 음식 냄새만 맡고도 요리 속 야채가 얼마나 익었는지를 파악하는 자키를 보며, 알렉상드르는 음식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젊은날의 자신을 떠올립니다.
바닥부터 꾸준히 밟아 올라간 정통파 베테랑 요리사 알렉상드르에게 거리낌없는 자유분방함과 타고난 천재성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는 청년요리사 자키의 출현은 긴장감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그건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궁정악장 살리에르와 모차르트의 관계를 닮았습니다. (실제로 영화 '쉐프'에서 젊은 요리사 자키는 '요리계의 모차르트'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쉐프'의 선·후배 요리사는 충돌하기보다는 협력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입을 동시에 벌어지게 하는 제3의 최첨단 요리 흐름이 그들을 경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요즘 미식 문화의 뜨거운 이슈라는 '분자(分子)요리'입니다.
분자요리란 음식 재료의 질감 또는 조직·요리법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변형시키거나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음식을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가령 올리브 기름을 액화질소로 순간 냉각해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 전혀 새로운 맛과 질감을 빚어내는 식이라나요.
레스토랑의 젊은 사장은 분자요리를 선호하는 요리평론가를 초청해 알렉상드르의 신 메뉴를 평가시킨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알렉상드르에게 가장 불리한 과제를 던짐으로써 그를 내쫓으려는 것이죠. 이 위기 앞에 구세대인 알렉상드르와 젊은 세대인 자키는 손을 잡습니다. 둘은 유명 분자요리 레스토랑에 일본인 부부로 변장을 하고 찾아가는 코미디까지 벌여가면서 분자요리의 특성을 파악해 보려 애쓰고 마침내 결전의 그 날을 맞이합니다.
영화 '쉐프'를 보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 '분자요리는 과연 요리의 최종적 진화인가'하는 궁금증이었습니다. 분자요리란 새로운 요리에 대한 도전의 극한에서 탄생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조리법을 새롭게 하고 싶어 음식재료의 분자까지 파고들고, 필요하면 화학물질도 쓴다고 합니다. 요리의 모양부터 완전히 새롭게 하려고 그랬는지 음식을 주사위 모양으로 잘라내기도 하고 동그란 구형의 기하학적 모양으로도 만듭니다.
영화에선 분자요리로 '압축 닭고기와 질소 넣은 샴페인' 같은 분자요리가 선보입니다. 이런 요리를 만드는 모습은 전통적인 키친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 시험관과 유리로 된 가열장치 등등이 얽혀있는 실험실 같은 공간에서 주사기까지 써 가며 음식을 만들어 냅니다.
실제 분자요리들이 모두 이런 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처럼 낯선 분자요리가 있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 분야의 최고로 평가받는다는 페란 아드리아라는 요리사는 공업용 식품첨가물까지 써 가며 음식을 공 모양으로 만들기, 젤리처럼 굳히기, 거품 만들기 등의 기법을 쓴다고 합니다. 그는 알려진 요리의 원료와 형태는 모든 것을 해체해 재구성하는 해체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일컫는다죠.
이런 분자요리의 지향점은 요리 뿐 아니라 문학·미술 등 창작의 세계에서 작가들이 추구하려는 새로움과도 닮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 분자요리들을 보면서 문제가 하나 느껴집니다. 맛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양이나 색채 그 어느 것에서도 인간의 식욕을 자극하는 힘이 약해 보입니다. 원재료의 형태와 색상등을 너무 변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자요리에선 더 훌륭한 요리를 추구하다, 맛을 잃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더 강하게' '더 새롭게' 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이 일의 본질을 훼손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예전 한국의 에로티시즘 영화들이 '뜨거움' '불타는 밤' '살' 등의 표현을 동원하며 자극적 제목 붙이기 경쟁을 벌이던 시절 등장한 '뼈와 살이 타는 밤'이란 제목이 떠오릅니다. 나름대로는 가장 강한 표현들을 한데 모으려고 했지만 결과는 "화장장(火葬場)에 관한 영화냐"는 실소 섞인 반응까지 얻었습니다.
영화에서 정말로 군침이 돌게 하는 요리란 마음을 담아 만들어낸 음식들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만드는 요리가 가장 아름답고 맛있게 느껴집니다. 알렉상드르는 아내와 사별한 뒤 한때 딸과의 관계도 소원해져 마음이 허전했지만 논문심사를 앞둔 딸을 위해 어느날 직접 케이크를 구워주며 요리의 진짜 즐거움을 새삼 느낍니다. 온갖 화려한 색상의 분자요리를 볼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건포도 알갱이가 몽글몽글 보이는 갈색으로 갓 구워낸 케익을 볼때 침이 꼴깎 넘어갔다는 나의 체험을 되새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