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새해 초, 조선일보에 '근대 문화를 호흡하는 현대인'을 겨냥한 새로운 상품 광고 하나가 선보였다. 자동차 광고였다. 일본 포드자동차주식회사가 낸 이 광고는 '자동차계(界)의 경이(驚異)'라는 제목 아래, 포드T 세단(sedan) 승용차를 알리고 있다. 한 대 값은 2670원(오늘의 약 5300여만원)이나 됐다(조선일보 1927년 1월 12일자).
자동차는 구한말 왕실에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부유층들이 사들여 한 대씩 한 대씩 상륙하고 있었다. 1912년엔 경성에 '탁시(택시)'도 등장했다. 하지만 1927년 이 땅의 자동차 문화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경성 시내 자동차 제한 속도가 시속 20마일(32㎞)이었다. 이보다 빨리 달리다 적발되면 '운행정지 20일'로 엄벌했다. 과속 운전자는 신문에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1928년 12월 3일자). 1927년 4월 경성의 민간용 자동차는 총 128대에 불과했다(1927년 6월 9일자).
그래서인지 초창기 자동차 광고란 요즘과 완전히 딴판이다. '큰 남자의 여유, OOO''자동차는 집이다. XXX 탄생!' 같은 오늘날의 자동차 광고처럼 개인을 겨냥해 소유욕을 자극하는 표현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능과 외관을 자랑하고, 자동차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바빴다. 자동차란 운송업자를 위한 사업용 장비였기 때문이다. '포-드 쎄단'은'우미(優美)하고 고상'하다며 출입문, 실내 등의 편의성을 자랑했고(1927년 1월 12일자), 화물차는 '여하한 천후(天候·날씨)에든지 감당하는' 차라며 강인함을 내세웠다(1927년 2월 10일자). 일본 제너럴 모터스 역시 '튼튼한 보데(body·차체)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 안전'이라며 내구성을 앞세웠다(1937년 8월 14일자).
1927년 5월엔 경성 시내에서 자동차 홍보 이벤트가 1주일간 열렸다. 5월 28일엔 죽첨정(竹添町·충정로)을 출발해 태평통(태평로)~경성부청(京城府廳·서울시청)~황금정(黃金町·을지로)~동대문~남대문~경성역(서울역)을 거쳐 충정로까지 25㎞를 행진하는 포드 차 선전 행렬도 선보였다(1927년 5월28일자).
초기 광고에서 재미있는 건 차량에 '첨부'하는 사양, 요즘 말로 옵션이다. 1927년 광고들은 '쎌프 스타-터 및 뺄눈 타이야 첨부'를 강조하고 있다. 시동을 거는 스타팅 모터와 낮은 압력으로 공기를 주입한 벌룬 타이어(balloon tire)를 장착했다는 것이다. 크랭크를 낑낑거리며 손으로 돌려 자동차 시동을 걸던 시대였기에, 이런 사양들이 최신 옵션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