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의료 정책은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 2000년 의약 분업 및 건강보험기관 통합 등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의료비는 계속 상승하지만 의료 수준이나 만족도는 떨어지고 있다. 의사에 대한 불신감이 점점 심해져 의사는 방어 진료에 급급하고, 의학 연구를 해야 할 시간은 병원 적자 대책안을 기획하느라 줄어들고 있다.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그동안 정부 주도로 달려온 의료 정책의 각종 후유증에 대한 점검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특히 경제 논리나 수치로 잡히지 않는 의사·환자·정부 간의 소원해진 관계가 가장 큰 후유증이라 생각한다. 최근 우리 의료 시스템에서 의사는 의료 상품을 파는 공급자, 환자는 수요자, 정부는 감시자이며 최근에는 정부에서 환자가 직접 의사를 감시하도록 홍보하고, 정해진 의료 예산으로 의사끼리도 불필요하게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환자 진료에는 의학 지식과 경험 외에 환자와 밀접한 관계, 즉 라포르(rapport)가 중요하다. 라포르가 형성되지 않으면 진료가 어려워지는데, 현재 8만명이 넘는 국내 의사는 제약 회사에서 뇌물을 받고 자기 수입을 위해 양심을 버린 파렴치한 공공의 적으로 지탄받고 있다. 라포르 상실로 인한 불신 때문에 환자는 의료 쇼핑을 하고 의사는 검사·촬영을 남발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국내 의료 체계의 1·2차 기관은 상급 병원 진료를 위한 진료 의뢰서 발행이 주 업무이며 3차 병원은 폭주하는 경증 환자들로 진료 시간이 부족하고, 정작 중증 환자 진료에 소홀해진다. 또한 의뢰받은 병·의원의 검사는 대부분 다시 해야 하므로 경제적·시간적 낭비가 심하다.
새 정부의 4대 중증 질환, 즉 암, 심장, 뇌혈관 및 희귀 질환에 대한 선심성 정책의 의료비 지출은 비효율적이며 다른 만성 질환자에게는 소외감과 불만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올해 7월부터 강제 시행되는 포괄수가제(DRG)는 보험 급여를 진료 내용에 관계없이 질병별 정액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단일 보험밖에 없는 국내에서 선택권 없이 이렇게 일괄 적용하는 것은 의료비 절감 효과보다 의료 수준을 하향 평준화시켜 국민 건강에 해롭고 의학 발전에도 역행할 우려가 크다.
의료의 공립화로 의료 수준이 퇴보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유능한 의사들이 떠나고 있는 영국 의료 체계나, 지나친 빈부 격차로 양극화되어 고비용 의료비 지출에도 의료 사각지대가 생겨나는 미국의 전철을 밟지 않고 한국만의 참신한 의료 시스템 개발을 고민할 때이다.
의료비 상승을 억제하고 의료 수준도 높이려면 먼저 중복·과잉 진료가 되지 않도록 약국·한의원을 포함하여 의료 전달 체계를 효율적으로 재정립하고, 특히 진료 일선에서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 즉 라포르가 회복될 수 있도록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 사명감과 자부심이 생기게 하면 의사들은 시키지 않아도 양심적으로 국민 건강 수호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환자는 고장 난 기계가 아니고 진료는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다. 새 정부는 응급실 당직법과 같은 갑 위치에서 의사를 통제하는 일방적 탁상 정책보다 의료의 특수성을 감안한 현실적 정책으로 의사와 함께 국민 건강을 목표로 서로 소통하여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이루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