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디니가 디자인한 와인 오프너 ‘안나 G’.

"이런 날엔 작업을 하지 않아요. 색깔의 미묘한 차이를 제대로 판별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8일(현지시각) 오전, 창밖으로 봄비가 내리는 이탈리아 밀라노 작업실에서 '색(色)의 마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영혼을 가진 디자인'이라 말하고, 그 영혼의 중심에 '아름다운 컬러'가 있다고 얘기하는 세계적인 디자인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82).

대중들에겐 여자아이 얼굴 모양의 와인 오프너 '안나 G'를 만든 디자이너로 더 잘 알려진 멘디니는 올해 밀라노 디자인위크(9~14일)에만 10개의 장외(場外) 전시에 참여한다고 했다. 병마개·후추통·양초꽂이 등의 '안나 G' 시리즈를 비롯, 18세기 빈티지 소파에 점묘화를 결합시킨 의자 '프루스트', 원색 벽면과 도트(점) 문양이 돋보이는 네덜란드 그로닝겐 미술관 등 멘디니의 작품은 팍팍한 현실을 위로해주는 듯한 동화 같은 디자인과 눈부시게 화사한 색상이 특징. 그는 "누구나 감동을 추구하는 욕구가 있다"며 "디자인은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나올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감동의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물론 평소엔 디자인의 힘을 잘 인식하지 못하죠. 뭘 모르는 사람들이 '병따개가 그렇게 예쁠 필요가 있느냐' '굳이 디자인 후추통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처럼요. 하지만 막상 잘 된 디자인을 사용하면 전에 쓰던 물품과 확연한 차이를 느끼게 돼요. 그게 색상이든, 작은 촉감이든 간에요. 디자이너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향상시켜야 하는 겁니다."

밀라노의 스튜디오 ‘아틀리에 멘디니’ 회의실에 선 알레산드로 멘디니. 앞의 작품은 아크릴로 만든 오브제(설치작품)로 멘디니 특유의 화사하고 감각적인 컬러가 돋보인다.

노(老)디자이너는 "내가 영향을 받은 건 경제상황이나 기후 같은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보아온 20세기 초반 큐비즘(입체파)과 아방가르드 미술"이라고 했다.

LG전자, 한국도자기, 롯데 등 수많은 한국 기업과 함께 일하기도 했던 그는 "한국 기업과 일하는 데서 얻는 장점이 많았다"며 "한국인들은 대체로 결과물을 '빨리빨리' 요구하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바짝 긴장하고 일에만 집중하는 효과를 거뒀다"고 했다. 그는 "한국 디자인의 진짜 문제는 '내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했다. "무척 아름다운 공예품과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멘디니는 "지난 40여년간 전시에 참여했지만 올해 디자인위크는 첫 번째 조명 브랜드인 '라문(Ramun)'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특히 각별하다"고 했다. 라문은 팔순(八旬)을 넘긴 멘디니가 처음으로 기획·디자인·제작·마케팅 등에 전부 관여한 조명이다. 또렷한 빨강·노랑·파랑 동그라미를 테마로 한 '아물레또' 라인이 대표적으로, 전선과 스프링을 전부 안으로 숨긴 간결하고 담백한 구조가 돋보인다. 그는 "해가 뭔지, 달이 뭔지를 두고 일곱 살짜리 손자 녀석과 대화하다 이 동그라미 디자인이 떠올랐다"며 웃었다.

'카사벨라' '도무스' 등의 건축·디자인잡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만 50세 늦은 나이에 디자이너로 전업(轉業)한 이 디자이너는 "내게 디자인이란 매일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시장성과 스스로 만족하는 디자인의 조화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