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처조카 고(故) 이한영(사진)씨의 긴박했던 망명 과정이 담긴 외교문서가 31일 처음 확인됐다.
외교부가 공개한 이 외교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김 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인 이씨가 망명을 요청한 지 나흘 만에 6개국을 거쳐 입국시켰다. 북한 공관은 실종된 이씨를 찾기 위해 "가출해 소식이 없는 19세 북한 외교관 아이를 찾는 걸 도와 달라"며 이례적으로 우리 정부에 접촉을 요청하는 등 동분서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82년 9월 28일 오전 제네바 주재 한국 대표부는 “북한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라며 귀순을 요청한 ‘공작원 김영철’의 전화를 받았다. 대표부는 김영철의 신병을 확보한 뒤 그날 저녁 서울의 외무부 본부에 긴급 비밀 전문(電文)을 띄웠다. 전문의 제목은 ‘몽블랑 보고(1)’. 외무부는 이후 망명 문제가 종결될 때까지 ‘몽블랑’을 암호명처럼 사용했다.
첫 전문에는 이씨와의 접촉 경위와 신병확보 사실, 귀순 의사 확인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 자신을 김영철이라고 밝힌 이씨가 리민영·이일남 명의의 여권도 소지하고 있다고 나와 있었다. 이일남은 이씨가 북한에서 쓰던 본명이다. 이씨는 망명 이후 ‘한국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뜻인 ‘한영(韓永)’으로 개명했다.
전문에는 이씨가 당시 “스웨터에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다른) 서류는 숙소에 두고 왔다”고 밝힌 내용도 있었다. 이씨가 망명을 긴박하게 결정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망명 요청자는 ‘무시무시한 보복’을 말하면서 자신에 대한 위해를 의식, 시종 초조해하고 불안감을 표시하고 있다”며 “보복을 두려워한 망명자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망명자를 스위스 밖으로 이동시키는 중이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대표부는 당시 김영철이란 가명을 쓴 이씨의 정확한 신분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에 ‘공작원 김영철이 김정일의 처조카 이씨와 동일인’이란 표현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이씨는 망명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엔 신분을 숨겼다. 나중에 조사 과정에서 김정일의 처조카라는 사실을 털어놨고, 그 말을 들은 정보 요원들은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처음에 미국으로 가길 원했다. 하지만 외교부가 “미국은 나중에 갈 수도 있으니, 한국으로 먼저 가자”는 설득에 한국행을 택했다. 이씨는 스위스→프랑스→벨기에→독일→필리핀→대만을 거쳐 망명 의사를 밝힌 지 나흘 만인 10월 1일 서울에 도착했다.
외무부는 관련 공관과 이씨의 망명 문제가 종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전문을 주고받았다. 정부는 공관 외교관들에게 ‘신분상의 불이익’ 등을 거론하면서 수시로 기밀 유지를 지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종료 후에는 재외공관에서 보관중인 관련 문서를 파기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씨는 1996년 남한에서 '김정일 로열패밀리'라는 책을 출판했다. 책에는 북한의 독재, 김정일의 성격, 김일성의 장녀 김경희의 애정 행각, 김정일이 계모 김성애와 권력 투쟁을 벌였던 내용, 김정일의 전처 등에 대한 세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씨는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남의 유년시절을 함께 해 주면서 김정일 일가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이미 남편이 있던 성혜림을 아내로 맞은 김정일이 자신의 가정을 비밀에 부쳤고, 이씨를 비롯한 친척만이 성혜림과 김정남에게 접근이 허용됐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베이징에서 귀순한 지 사흘 뒤인 1997년 2월 15일 경기도 성남의 한 아파트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피격돼 숨졌다. 당시 공안당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 전 비서의 한국행은 막아보려 했던 북한이 황 전 비서에게 테러를 통해 '죽음'이라는 경고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만 30년이 지난 외교문건 중 심사를 거쳐 공개가 결정된 총 1490권, 22만여쪽의 외교문서를 이날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