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무대요, 온갖 남녀는 배우. 각자 퇴장도 하고 등장도 하며 주어진 시간에 각자는 자신의 역을 하는 7막 연극이죠."(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의 2막 7장 중)

조 라이트 감독은 '안나 카레니나'를 연출하면서 원작자 톨스토이보다는 셰익스피어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전화번호부만큼이나 두꺼운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이미 10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원작을 완독(完讀)한 사람은 많지 않지만, 안나 카레니나가 젊고 잘생긴 브론스키 백작과 불륜을 저지르다 결국 기차에 몸을 던진다는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들이 이 나라와 문화가 가진 '크기'에 집착했다면, 그는 영화 속의 세상을 실제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안나 카레니나' 중 한 장면. 말에 탄 배우들 뒤에 항구처럼 보이는 배경은 무대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원작의 주요 배경을 무대처럼 만들어 이를 다시 영화로 옮기기 위해 아예 극장을 지었다. 무대의 넓이만 해도 50피트(15.2m)×100피트에 달하고 극장의 객석과 무대 뒤까지 다 그대로 지어 이를 영화의 한 부분으로 활용했다. 무대 위에 차려진 파티장을 나와 무대 장치가 있는 곳으로 가면 거기엔 빈민가가 펼쳐지는 식이다. 배우들은 장면이 전환될 때 아예 무대 소품을 직접 옮기기도 한다.

라이트 감독은 러시아 문화사를 다룬 책 '나타샤 댄스'(저자 올랜도 파이지스)에서 영화 형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 책에 따르면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듯 가짜의 삶을 사는 것과도 같았다. 무대는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당시 사회를 은유하기 위한 장치로도 사용되는 셈이다. 노동의 가치와 순수한 사랑을 고민하는 귀족 레빈의 집과 영지(領地)는 무대에서 촬영되지 않았다.

현실과 동떨어진 당시 귀족들의 휘황찬란한 삶과 위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대'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봉제선이 보이지 않는 옷처럼 무대 전환은 교묘하고, 배우들의 호연이 화면을 장악하기 때문에 무대의 규모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경마장 장면은 무대 배경에 경마장이 그려져 있고 무대 앞의 조그만 원을 말 몇 마리가 천천히 돌아간다. 하지만 이 장면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진 않는다. 낙마한 애인을 보고서 슬픔을 주체 못하는 안나 카레니나와 불륜을 확인한 남편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화면을 꽉 채우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풍속을 다룬 원작은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인간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하지만 이를 충실히 담아냈다고 평가받는 영화는 없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라이트 감독은 그래서 톨스토이 대신 셰익스피어를 택했는지 모른다. 그의 '안나 카레니나'를 두고 어떤 이들은 원작을 과감하게 비튼 용감한 연출이라고, 또 다른 이들은 원작의 정수를 잃어버린 만용의 연출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들 중 가장 높은 미학적 완성도와 독창성을 갖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21일 개봉.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