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미국 흑인 노예 해방이란 역사적 사건으로 우아한 할리우드 영화 '링컨'(14일 개봉)을 만들었다. 같은 소재를 갖고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피와 살이 튀는 B급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이하 장고)를 내놨다. '링컨' 같은 영화를 보며 미국 역사의 진보가 그려낸 감동과 유려한 정치적 수사에 숙연해진 사람들에게 타란티노 감독은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이봐, 뭘 그렇게 심각해. 영화로 진탕 즐겨보자고!"

총에 맞아 살이 터지며 피가 튀는, 잔인한 장면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장고'는 마르지 않는 재미를 품은 영화다. '장고'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세르지오 코르부치 감독의 마카로니 웨스턴 '장고'(1966)의 영향을 받았다. 죽은 아내의 복수를 위해 관을 끌며 황야를 헤매던 반(反)영웅 장고(프랑코 네로)는 타란티노의 손을 거쳐 팔려간 아내를 찾으려는 흑인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가 된다. 독일에서 온 현상금 사냥꾼 닥터 슐츠(크리스토프 왈츠)는 장고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고 함께 아내를 찾아나선다. 장고의 아내는 잔인한 노예 싸움 '만딩고'를 즐기는 캘빈 캔디(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노예다. 캔디는 자신의 노예에게 '달타냥'(소설 '삼총사'의 주인공)이란 이름을 지어놓고서 알렉상드르 뒤마에게 흑인의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는, 허위의식에 가득 찬 상류층이다.

‘장고:분노의 추적자’의 한 장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크리스토프 왈츠, 사무엘 L 잭슨, 제이미 폭스(왼쪽부터). 이 배우들이‘독하고 웃기는 연기 잘하기’대회에 나갔다면 공동 1위를 했을 것이다.

단순히 코르부치 감독의 '장고'에서 캐릭터만 빌려왔다면 '과잉과 복제의 대명사'로 불리는 타란티노가 아닐 것이다. 옛날 장고를 연기한 프랑코 네로가 영화에 나오는가 하면, 코르부치 감독의 또 다른 웨스턴 영화 '위대한 침묵'(1968)을 패러디해 눈밭에서 눈사람에 총을 쏘는 '귀여운' 장면까지 넣었다. 캔디가 즐기는 노예 싸움도 흑인 노예의 비참한 삶을 그려낸 영화 '만딩고'(1975)에서 따온 것. 웨스턴, 특히 마카로니 웨스턴에 열광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은 기쁨의 탄식을 내뱉을 것이다.

굳이 웨스턴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에 열광할 구석은 아직 많이 남았다. 타란티노 감독은 그의 장기인 '시치미 뚝 떼고 장황한 말 늘어놓기'를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도 적용했다. 여기에 완벽한 호응을 해주는 건 크리스토프 왈츠. 총에 맞아 절규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예의를 차리며 무표정하게 기나긴 문장을 능청스레 읊어대는 연기를 보자면 타란티노 감독이 왜 전작(前作) '바스터즈:거친녀석들'에 나왔던 왈츠를 또 기용했는지 알 만하다. 왈츠는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두 편에 출연한 걸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두 번 받았다.

웨스턴도, 타란티노와 왈츠도 별로 안 당기는 이들을 위해 이 영화가 마련한 안전장치가 바로 음악이다. 눈감고 음악만 들어도 표값의 절반 정도는 챙길 것이다. 제임스 브라운, 존 레전드, 앤소니 해밀턴, 투팍 등 흑인음악 전설들의 노래와 엔니오 모리코네의 선율이 영화와 함께 리듬을 탄다.

'165분'이란 이 영화의 상영시간에 지레 겁먹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짧은 영화라고 재밌는 게 아니듯, 긴 영화라고 지루한 것도 아니다. '장고'의 165분 중 필요 없거나 인상적이지 않았던 1분을 꼽을 수가 없다. 어떻게든 울리거나 웃기려고 작정하고 만든, 진부한 90분짜리 영화를 볼 바에는 '장고'를 두 번 보는 걸 택하겠다.

21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