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깜깜해지자 온몸의 신경이 발로 쏠렸다. 밑창 두께가 5㎜밖에 안 되는 시각장애인용 신발을 신고 도로 바닥을 이리저리 디뎌봤다. '멈추고 주변을 살피라'는 원점 모양의 점형 블록인지, '계속 가라'는 선 모양의 선형블록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상버스를 타려면 30m를 걸어가야 했다. 흰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걷다 보니 미리 봐 뒀던 코스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저상버스 출입구 앞에서 장애물에 걸려 전진할 수 없었다. 손으로 더듬으며 옆으로 비켜서다 또 '쿵' 하고 뭔가에 부딪혀 주저앉아야 했다. 걷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본지 황예린 인턴기자가 이틀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재활원에서 운영하는 '장애 체험 프로그램'을 체험했다. 하루 3시간씩 짧은 기간이라도 휠체어 타보기 등을 통해 장애인의 고통을 직접 느껴보고자 재활원 측이 일반인을 상대로 마련한 프로그램이었다.

지난달 25일 오후 3시 재활원 교육동 2층. 지체 장애 체험을 위해 휠체어 조작법 등을 1시간 동안 배운 뒤 휠체어에 올랐다. 순간 시야가 확 달라졌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사람들은 다리, 몸통, 어깨가 더욱 굵고 넓게 보였다. 턱의 아랫면이 드러나 눈보다는 입 주변 근육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사람들이 위압적으로 보였다.

당장 불편한 건 고개를 90도가량 꺾어 올려야 일반인과 눈을 맞출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공지훈(27) 교육 담당교사는 "휠체어 타는 분들이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비장애인 분과 눈 맞추고 대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 교사가 무릎을 굽혀 휠체어에 앉은 기자의 높이와 같아지자 목이 편해졌고 말하기가 수월해졌다.

시각장애 체험에 나선 황예린 인턴기자는 “걷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국립재활원의 '장애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황예린 인턴기자가 휠체어를 타고 있다.

식당 출입구에 있는 흙털이용 매트가 처음으로 야속하게 느껴졌다. 1~2㎜ 두께의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졌지만 그 위를 지나갈 때 휠체어는 덜컹거렸고 그 충격은 몸에 그대로 흡수됐다. 평평하게 보였던 도로도 휠체어를 타고 가니 '요철로(凹凸路)'가 따로 없었다. 새끼손톱만 한 돌을 무시하고 가다 오른쪽 바퀴가 왼쪽으로 확 비틀렸다. 평소라면 10초면 건너갈 25m짜리 횡단보도는 녹색 점멸 신호 10칸이 다 사라지도록 건너지 못했다.

"그래도 잘 타는 편"이라는 공 교사의 말이 들리자마자 급경사가 나타났다. 가슴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온 힘을 다해 바퀴를 앞으로 밀었다. '끙'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고 얼굴엔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튿날 재활원 교육장 밖으로 나가 진통제를 사오는 과제를 받았다. 실제 도로는 교육장보다 훨씬 험했다. 반쯤 깨진 보도블록이 군데군데 널려 있었고 그늘진 곳에 쌓여 있는 작은 눈덩이도 '암초'와 같았다. 한쪽으로 쏠린 경사로에선 휠체어가 차도 쪽으로 기울면서 방향까지 틀려 온 힘을 쏟아야 했다. 마찰열로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작은 주차장을 건너다 은색 승용차가 갑자기 나타났다. 깜짝 놀라면서 휠체어 중심이 흐트러졌다. 경사 아래쪽에 있는 승용차를 향해 휠체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순간 뭘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담당 교사가 달려와 승용차와 충돌 직전에 휠체어를 붙잡아줬다. 네 차례 시도 끝에 혼자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가 진통제를 샀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체력은 바닥난 상태였다. "모든 도로에 장애인용 승강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왕복 600m 거리의 약국을 다녀오는 데 걸린 시간은 40분이었다. 평소 걸음으로 5~10분 거리였다.

시각 장애 체험 역시 손에 진땀이 밸 정도였다. 평소 두세 칸씩 뛰어오르던 계단 한 칸도 쉽게 올라가지 못했다.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던 핸드레일(난간)이 '생명줄'이었다. 그러나 그 줄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지팡이로 전방을 두드리고 왼손으로 허공을 더듬는 동작이 수차례 반복됐다. 겨우 잡은 핸드레일에 의지해 윗계단을 잘못 밟아 몇 차례 넘어질 뻔했다. "지팡이로 계단 높이를 확인하고 발을 디뎌라"는 담당교사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유도블록이 없는 인도(人道)에선 좌충우돌이 반복됐다. 흰 지팡이로 앞을 쳐보고 장애물을 확인하고 주변을 다시 두드려봤지만 뭔가 꽉 막힌 장애물이 나타났다.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하고 여기 더듬고 저기 더듬자, 담당교사가 "뒤로 도세요"라고 했다. 나중에 그곳이 벽이란 사실을 알았다. 유도블록 없는 도로의 시각 장애인은 망망대해에 나침반 없는 배와 같은 신세라고 생각했다.

코스를 돌고 나서 안대를 벗으니 체험장이 믿기지 않을 만큼 좁아 보였다. 2분이면 둘러볼 코스를 30분 이상 걸린 셈이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1급 시각 장애인이 국내엔 3만3000명 있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작은 돌멩이가 보여 얼른 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