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핵가족 시대가 열렸다는 통념은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오히려 전통시대에 대가족이 드물었음은 조선 중기에도 핵가족의 비율이 65.5%에 달했다는 연구만이 아니라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주제로 한 고전소설도 방증(傍證)한다. '흥부전'은 유산을 나눠 받지 못한 차남 가족의 경제적 빈궁을, '심청전'은 아내와 사별한 장애인 편부(偏父) 가족의 고통을, '콩쥐팥쥐전' '장화홍련전'은 재혼 가족 내 전처(前妻) 소생 딸에 대한 계모의 박해를, '홍길동전'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한 일부다처제 가족 내 얼자(孼子)의 비애를 잘 보여준다.

질병과 기근이 만연했던 전근대 사회에서 장수(長壽)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기에 여러 세대의 혈족(血族)이 한 가구를 이루고 살 가능성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물었다. 그렇기에 광범위한 친족(親族) 사이의 유대와 부양은 혈연 공동체로서 문중(門中)을 중시했던 소수 상층 양반 계층에서나 가능했지 일반 민초(民草)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도덕적 이상이었다. 사유재산이었던 노비 가족의 애환은 소설의 소재조차 되지 못했다.

'대가족'의 추억… 1988년 '정부 수립 40년' (문화공보부)에 실린 대가족.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호적제도에 의해 근대적 단위 가족이 법제화되고 지식인들이 서구의 '단란한 가정(sweet home)' 개념을 소개하면서 부부 중심 핵가족의 필요성이 계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부장권은 여전히 건재했고 여성들은 부덕(婦德)이란 미명하에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광복 이후 양성(兩性) 평등을 향한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1960년대 언론에 대가족의 폐해에 대한 비판 기사가 봇물을 이뤘지만,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노인 소외가 사회문제화되면서 언론의 논조는 핵가족 예찬에서 비판으로 급선회했다.

1991년 아들 딸 구별 없는 평등 상속이 법제화되고 2008년 일인일적부(一人一籍簿) 제도가 시행되면서 개인의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이 시대 가족의 자화상은 여전히 장밋빛이 아니다. 세계 3위를 달리는 이혼율과 턱없이 낮은 출산율, 늘어만 가는 1인 가구와 조손(祖孫) 가족 등 가족 붕괴가 일어나고 있는 오늘 우리 가족제도 변천사에서 얻는 교훈은 서로의 버팀목이 되는 호혜(互惠)구조로 가족의 기능을 되살리는 것이 모두의 살길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정해진 길을 걷기에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 됨을 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