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걸

2009년 준공한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아산정책연구원은 안과 밖의 표정이 사뭇 다른 건물이다. 겉은 정사각형 평면의 유리 상자처럼 평범하게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비정형 유리 곡면의 역동적 공간이 펼쳐진다. 내부 공간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트여 있는 이 건물의 형태는 단면도를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엎어 놓은 표주박을 닮은 곡면 위에 유리 상자를 씌운 모양이다.

건물 바로 옆은 경희궁. 주변에는 작은 갤러리, 주택, 카페 등이 모여 있다. 5일 이곳에서 만난 설계자 유걸(73·아이아크 대표)씨는 "건물이 연구원의 '브랜드'가 되길 바랐지만 화려한 형태를 겉으로 드러내기엔 주변에 미안했다"고 했다.

이 건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비정형의 유리 곡면, 기둥이나 보가 드러나지 않는 실내 등 첨단 건축 기술과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 "왕이나 귀족 같은 소수를 위해 수백 명이 일하던 시절에는 손재주에 많이 의존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수백 명의 다수를 위해 소수가 건물을 짓는 시대잖아요. 저 역시 '손맛'을 감성적으로 싫어하지는 않지만, 오늘에 어울리는 건축의 방법은 과학과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기술을 강조하는 자신의 건축관(觀)을 가장 잘 구현한 대표작이 바로 이 건물이라는 얘기다.

(위)표주박 모양 곡면 구조물의‘손잡이’부분으로 들어온 자연광이 실내에 퍼지는 아산정책연구원 갤러리, (아래)건물을 수직으로 자른 단면도.

연구원을 들어서면 중간에 천장까지 트인 대공간(大空間)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언뜻 다리(橋)처럼 보이는 계단들이 그 사이를 가로지른다. 유 대표는 "비어 있는 공간을 공유하면서 각 층의 사람들은 서로 건너편 사람들을 바라보고 시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며 "각 층을 폐쇄적으로 소유하는 기존 건물의 방식 대신 층간 분리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설계했다"고 했다.

사무실·연구실 등은 대공간의 곡면과 외벽 사이에 들어갔다. 기둥과 보 같은 구조가 노출되지 않아 널찍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건물 가운데가 비어 있는 만큼 전체 가용(可用) 면적에선 손해가 아닐까. "가운데 빈 공간은 용적률(건축물 연면적의 대지면적에 대한 백분율)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면적의 손실은 없어요. 빈 곳이 많아 보여도 용적률과 건폐율(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면적의 비율)을 최대로 확보한 건물입니다."

(위)연속한 삼각형 모양의 구조물에 유리를 붙여 만든 내부의 대공간, (아래)박스형 외관 앞으로 곡면 구조물의 일부(점선 안)가 살짝 돌출된 모습

유 대표는 "건물의 외벽과 내부 대공간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 채광으로 쾌적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실제 건물에 들어서면 외부 유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빛과, 1층 외부와 천장에 작게 드러난 대공간의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모두 체감할 수 있다. "외벽만 유리라면 실내 안쪽은 컴컴하겠죠. 조명으로 어두운 곳을 밝힐 수도 있지만 (대공간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의 질(質)을 따라가진 못해요."

최근 유리 건물이 늘면서 냉·난방과 에너지 효율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유 대표가 설계한 서울시 신청사도 같은 논란을 겪었다. 유 대표는 "유리 자체가 아니라 유리를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연구원 건물의 경우 "유리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열로 따뜻해진 실내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데, 천장 부분의 유리를 열면 공기가 빠져나가며 자연 순환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기계를 돌려 공기를 순환시키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건물은 국토부·환경부가 공동 시행하는 친환경건축물 인증 제도에서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