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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또 다른 이름, 시네마 천국

김승구 지음|책과함께|288쪽|1만4800원

"열여덟 살 먹은 청년이올시다. 수년 전부터 활동사진 배우를 부러워합니다. 어찌하면 활동사진 배우가 될까 하여 마음을 태우고 있으나, 아무 도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습니까?" (견지동 김○○)

1920년대 중반 일간지에 실린 독자 투고다. '견지동 청년'의 하소연 바로 밑에 신문기자의 '답'이 실렸다. "많은 사람들이 허영에 날뛰어 그러한 곳으로 들어가는 일이 많습니다.(중략) 그러한 배우 생활이란 물질상으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으나, 잘못하면 영영 구원받을 수 없는 타락 생활에 들어가기 쉬운 일이니 충분히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의 할리우드 키드

영화 애호가인 김승구 세종대 국문과 부교수가 일간지와 잡지 등을 토대로 일제강점기 한국 영화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저자는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광고를 근거로 한국의 영화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고 주장한다.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 '활동사진'을 입장료 10전에 상영한다는 내용의 광고다.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 담론을 좌우한 것은 단연 할리우드 영화. 1920년대 이후 할리우드 영화가 본격 유입됐다. 당시 미국 정부가 자국 영화의 수출 활로를 모색하려 발벗고 지원에 나섰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등장하는 '활극'이 큰 인기를 끌었다. '로빈 후드'(1922), '돈 큐'(1925), '해적'(1926) 등 주로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이 악당과 싸워 이기는 해피엔딩 영화들. 저자는 "영화 속 부정적 현실과 이를 극복하는 더글러스의 모습은 관객이 식민지 현실에서 느낄 수밖에 없던 우울과 절망을 정화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1907년 개관한 이후 한국영화의 역사와 함께 한 단성사. 사진은 1955년 모습이다.

영화는 도덕적으로 위험한 물건

할리우드 스타를 둘러싼 소문도 무성했다. '비참한 생애가 스타를 출산'(매일신보 1927년 5월 6일자), '기이한 운명, 스타의 출세담'(매일신보 1927년 5월 7일자) 같은 연예 기사가 연일 신문을 장식했다. 청년들은 성숙한 이미지의 그레타 가르보나 청순한 릴리언 기시의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을 방에 걸어놓고 열병을 앓았다. 어른들은 영화가 '도덕적으로 위험한 물건'이라고 우려했다. 게다가 1920년대 청년에게 영화는 값비싼 오락이었다. 1929년 11월 17일 경성 조선극장 입장료는 성인 기준 50~80전. 비슷한 시점 춘천군청 고원(雇員·임시직원)의 월급이 23원이었다.

1930년대에 유성(有聲)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스크린 옆 책상에 앉아서 등장인물의 '입'을 대신하기에 바쁜 변사는 일제강점기 영화관의 꽃이었다. "그때는 영화 구경보다도 변사를 따라다닌 셈이지요. 서상호가 제일 나았어요." (김성진, '영화팬의 수첩')

영화관이 아니라 콘서트장

영화관 안 풍경은 어땠을까. 초창기엔 남녀 좌석이 분리돼 있었고 '부인석'은 주로 2층에 있었다. 냉난방 시설이 부족해 관객들은 더위와 추위에 시달렸다. "추운 때는 두 점의 노화(爐火·난롯불), 더운 때 두세 개의 풍선(風扇·선풍기)" 수준이었다. 관객들은 주인공의 연기에 따라 환호성과 야유를 수시로 내뱉으며 영화관을 콘서트장으로 만들었다.

영화 광고는 주로 일간지를 통해 이뤄졌다. 같은 영화의 제목도 상황에 따라 바뀌었다. 1918년 9월 13일 신문광고에 게재된 영화 '가(家)없는 아(兒)'가 20일 광고에서는 '숙무아(宿無兒)'로 돼 있다. 저명인사를 활용한 홍보 방식은 그때도 있었다. 대체로 황실 인사들이 인용됐다. 1919년 7월 광고. "지금 단성사에서 공개하는 명화대회는 모두 금상 폐하께서 천람(天覽)하시고 각 황족 전하, 왕세자 전하께서 태람(台覽)하신 명사진이므로…".

1938년 11월 26일엔 조선일보 주최로 '국내 최초의 영화제'가 열린다. 당대의 인기 여배우 문예봉, 한은진 등이 벌인 친필 사인 행사는 오늘날 '팬사인회'의 시초인 셈. 저자는 "외국영화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이들에게 조선 영화의 성과를 확인시켜준 행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영화 관객 1억명 시대에 돌아보는 격세지감과 이채로움. 일제강점기 영화 자료의 한계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자료를 모은 노력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