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원상 뉴시스와 인터뷰

'고문(拷問), 숨기고 있는 사실을 강제로 알아내기 위해 육체적 고통을 주며 신문함.'

배우 박원상(42)은 영화 '남영동 1985' 개봉 전 "이 영화로 관객들을 유혹해야 해요. 거기에 동참해주셨으면 합니다"고 청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유혹하려면 제가 고문 받으며 생각했던 것, 겪었던 것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어 독백으로 가득한 극본을 통째로 외워버렸듯, 촬영 때 느낀 몸과 생각의 감각을 논리정연하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한 시간이 꽉 찼을 정도다.

'남영동 1985'는 1985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장의사 집 둘째 아들'로 통하는 고문기술자(74)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정치인 김근태(1947~2011)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이 토대다. 영화는 민주화운동가 '김종태'가 가족들과 목욕탕을 다녀오는 길에 경찰에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당한 22일간의 고문일기다. 박원상은 "이 영화는 '고문에 대한 영화'이고 용서에 관한 영화지만 기억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통해 잊고 있던 과거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루하루 벌어진 일들을 기억으로 짊어질 수 없지만 잊으면 안 되는 기억들이 있다. 불편하다고 외면해 버리고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지 말라고 종용하는 건, 아닌 것 같다"며 답답해했다.

"혹자는 왜 자꾸 과거의 일에 붙들려 있느냐고 말한다. 미래를 보라고…. 제대로 된 미래로 가고 싶으면 과거의 기억들이 있어야 한다. 그 기억을 끊어버리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과 피의 공포로부터 벗어났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진행되는 일이다. 단순히 고문 피해자들만의 기억이고 그분들에게만 진행형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기억을 단절시키다 보면 누구나 고문 피해자들이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고문이라는 게 인간의 가치에 대한 고민이다. 또 다른 형태의 고문, 또 다른 형태의 남영동이 재발할 수 있다.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서 짚어줘야 한다"는 믿음이다.

"15세 관람가 등급이 나온 게 다행이고 반갑다. 어린 친구들도 많이 봤으면 좋겠다. 어린친구들이 뭘 아느냐고 묻는 어른들에게 '당신들은 뭘 알고 있습니까?'라고 되묻고 싶다. 그 시절 한참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얘기해주는 것은 선배들의 몫"이라는 사명감도 감추지 않았다.

박원상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 전 의장으로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에 저항한 민주투사 '김종태'를 연기했다. 1985년 9월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법 감금당한 채 '이두한'(이경영)을 비롯한 수사관들에게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한다.

정지영(66) 감독에게 출연제의를 받고 "자의식이 내 발목을 잡았다"고 털어놓았다. "고문장면을 어떻게 감당하고 연기해야 하는지는 우선순위가 뒤였다. 고등학교 때 연극을 만나 대학교 4년 동안 대한극장에 서 굴러다니고 극단생활을 했다. 하고 싶어 하는 배우를 직업으로 삼고 행복하게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 하지만 내가 맡은 '김종태'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온 분이다. 대학시절 밖에서는 과 동기들이 학생운동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극단에서 연극만 했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88년만 해도 휴강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극장으로 내려가 연극에 빠져있었더니 동급 친구가 나에게 '회색이다'고 말했다. 대학교에 올라가면 연극을 할 수 있다는 핑계를 댔던 나다. 또 60이 된 '김종태'를 연기하는 게 상상이 안 됐다. 나만 주름을 그리고 흰머리를 칠하는 게…. 처음에는 감독님에게 내가 '이두한' 역할을 하겠다고 칭얼댔다. 그랬더니 이경영 선배님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너는 이 역할을 무조건 해'라고 하더라."

그렇게 촬영에 들어간 박원상은 코와 입으로 세차게 들어오는 물고문을 견뎌야했다. 또 전기고문을 표현하기 위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체도 드러냈다. 목에 밧줄을 묶고 맨몸으로 바닦을 기어가는 연기도 감수했다.

"30년 동안 배꼽 위로 물이 올라오는 데로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첫 촬영 때 칠성판에 묶여 물이 쏟아지는 순간 물에 대한 트라우마들이 한 번에 오더라고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어 빨리 극복해야만 했다. "특수 분장의 힘을 빌릴만한 시간도, 여유도, 대역을 쓸 수도 없었다. 오로지 물 공포증을 극복하고 호흡을 연기로 커버해야만 했다. 그래도 나는 연기라 적응할 수 있었다. '남영동' 책을 보면 현실은 고문을 당해도 익숙해질 수 없다. 현실과 영화의 괴리였다."

"나는 흉내내는 것도 죽을 만큼 힘들었다. 그곳에 끌려가서 당했던 분들의 고통은 가늠이 안 됐다. 그런 생각들이 촬영 중간에 찾아오면서 먹먹해졌다. 몸 힘든 거야 회복이 된다. 내가 한 것은 실제가 아니라서 힘들어도 극복할 수 있다. 또 다른 작업을 할 테고 자연스레 잊혀질 테고…"라며 탄식했다.

'부러진 화살'에 이은 '남영동 1985'는 정 감독의 2013년 문제작으로 꼽힌다. 과거 정권이 저지른 불편한 진실로 12월19일 치러질 제18대 대통령선거를 겨냥했다는 지적도 있다. 정치색이 짙은 배우 문성근(59) 명계남(60)의 출연도 영화를 곡해하기 만들기에 충분하다.

박원상은 "시기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최선으로 최대의 것을 했기 때문에 배우의 입장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내 역할은 최선을 다해 관객을 유혹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배우가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정치적 색깔이 짙다'는 말은 진지하게 생각 안 한다. 물론 영화를 꼬투리 잡아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실제 증언에 대한 기록이며 감독님도 그 틀을 벗어나지 않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영화를 만들었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쓰고 싶지 않다. 그런 분들이 많지 않기를 바란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다만 "연기이고 영화인데 관객들이 힘들게 본다. 객석에 앉게 되면 2시간 동안 쉬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버텨주는 걸 보면 힘이 된다.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기억이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희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