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경주 기자] 움직임은 거의 없다. 심지어 옷도 입고 있지 않다. 행복과 기쁨이라는 감정보다는 두려움과 자괴감만이 얼굴엔 가득하다. 영화 '남영동 1985' 속 배우 박원상의 모습이다.
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수기를 바탕으로 1985년,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남영동 대공본부에서 22일간 벌어졌던 이야기를 다룬 '남영동 1985'는 상영 내내 각종 고문의 방법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고문의 기술'이라는 책을 펴내도 될 정도로 영화는 사람을 극한으로 치닫게 하는 다양한 고문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이 다양한 종류의 고문을 당하는 이는 오직 한 명, 박원상뿐이다. 장소의 변화도 없고 고문 때문에 점차 육체적으로, 심적으로도 피폐해져 가는 박원상만이 스크린에서 그려진다. 너무나도 안쓰러운 그의 모습에 왜 이렇게 힘든 영화를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고개를 내민다.
지난 8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원상은 이에 대한 의문의 해답으로 '믿음'을 꼽았다. 영화 '부러진 화살'로 인연을 맺었던 정지영 감독의 연출력과 당시 함께했던 스태프들에 대한 믿음이 영화를 선택하는데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정지영 감독님을 만나 '부러진 화살'을 찍었고 '부러진 화살'을 많은 분이 응원을 해주셨죠. 아마 영화 홍보 중간 즈음이었을 거에요. 감독님이 저에게 '다음에는 이러이러한 영화를 할 건데 '부러진 화살'을 작업했던 사람들이 같이 넘어와서 해야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하시면서 '남영동 1985' 주인공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어마어마한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 말씀을 듣고 '내가 이 일을 버티고 한 보람이 있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독님 손을 덥석 잡았죠(웃음)."
아무리 감독에 대한 믿음이 컸다고 하지만 촬영 내내 고문이라는 힘든 연기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일말의 망설임은 없었을까. 이에 돌아온 박원상의 대답은 의외였다. 오히려 고문은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남영동 1985'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박원상이라는 배우가 그 실존 인물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인물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물론 고문에 대한 고민이 있었죠. 하지만 '고문을 어떻게 찍겠다는 걸까'라는 고민은 저에게 우선순위가 아니었어요. 우선순위는 내가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거였죠. 영화에서는 제 역할이 김종태라는 이름으로 나와요. 하지만 관객분들은 김종태를 김종태로 보지 않고 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보겠죠. 그 고민을 하면서 제가 걸어왔던 길들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꽤 오래 고민했어요."
'남영동 1985'를 직접 확인하면 알겠지만, 영화의 80% 이상은 고문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면 끔찍함과 괴로움 동시에 궁금증이 생기게 마련이다. 저 연기 어떻게 했을까. 고문을 연기하면서 재밌는 일화는 없었느냐고 물으니 박원상은 물고문 중 생긴 에피소드를 전해왔다.
"저는 원래 물 공포증이 있습니다. 물에 빠져서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배꼽 이상으로 물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영화에 수영하는 장면이 있으면 못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물고문 장면이 있다고 해서 이것은 제 물 공포증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물이 쏟아지니 힘들고 당황스러워서 뿌리쳤어요. 그리고 내색하지 말걸 후회했습니다. 제가 힘든 것을 티를 내면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는 거니까요. 그래서 버틸 때까지 버티고 정 안 되겠으면 신호를 보낼 테니 그때는 나를 놔달라고 약속을 하고 촬영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힘들어서 신호를 보냈는데 약속하고 다르게 저를 더 세게 누르는 거에요. 속으로 생각했죠. '큰일 났다. 사고구나. 내가 보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구나'. 혼미해져서 죽기 살기로 뿌리쳤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서 결국 물 공포증을 극복했어요(웃음)."
고문 연기로 지친 박원상에게 또 한 번의 도전이 찾아온다. 영화 속에서 성기까지 드러나는 전신노출 장면이 등장하는 것. 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는지 물어보니 박원상은 극 흐름상 꼭 필요한 장면이었기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찍었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거부감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그에겐 노출도 곧 연기였다.
"감독님이 전신 노출 장면이 있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그 장면이 꼭 필요한 장면이어서 거부감 없이 찍었어요. 고문에 있어서 첫 단계는 옷을 벗기고 그 사람을 해체하는 것이라서 발가벗겨져 해체돼버린 김종태의 모습이 필요했던 거죠. 그리고 고문영화를 찍는데 제가 옷을 걸치고 있는 게 좀 아이러니하잖아요(웃음)."
trio88@osen.co.kr
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