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케르트 더 용의 2011년작‘생각하는 사람’.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추상미술의 아버지' 칸딘스키(1866~1944)는 1912년 이런 제목의 책을 썼다. "미술은 형태의 재현을 넘어서 정신적인 영역에 속해있다"며 미술의 정신적 가치를 탐구한 책이다. '대체 뭘 그린 것인지 모르겠다'는 관람자의 푸념에도 불구, 추상미술이 크게 발전한 데는 이 책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요즘 국내 주요 전시장 풍경이 이렇다. '보이지 않는 것의 힘'에 초점을 맞춘 삼성미술관 리움의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을 비롯, '정신성'과 '성찰', 그를 통한 '치유'가 올가을 국내 미술계의 주요 키워드.

詩 읽고 별 관찰하며 '본질' 숙고

"내가 나무였을 때/내가 의자였을 때/내가 열매를 맺었을 때(…)내가 불이 되어도/나는 종이로서 만족한다."

전시장 바닥에 흩뿌려진 한 무더기의 종이에 이런 시(詩)가 적혔다. 종이 무더기 한가운데엔 초등학생용 나무 의자가 놓였다. 관객은 자유롭게 종이를 주워 시를 읽으면서, 열매를 맺었다가 의자가 되고, 불쏘시개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나무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의자 주위를 맴돌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는 관객의 사색을 돕기 위한 소리다.

이 설치 작품 '나는 종이로서 만족한다'는 재독(在獨) 미술가 최재은(59)의 개인전 '오래된 시'의 출품작 중 하나. 작가는 "사물을 접할 때 시각적인 형태에 국한하지 않고 그 본질을 가까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밝혔다. 최재은은 일본 선(禪)사상에 매료돼 '시간성'과 '생명' 등 정신의 영역을 다룬 작업을 오랫동안 해 온 작가. 이번 전시에선 해질 무렵부터 새벽녘까지 8시간 동안 밤하늘을 찍어 달과 별, 구름,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영상 작품 'Finitude(유한성)' 등을 내놓았다. 다음 달 22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02)735-8449

'도덕성'과 '자기 관찰' 통해 인간 내면 본다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긴 남자. 그러나 알록달록한 옷과 우스꽝스러운 깃털 모자는 남자가 '광대'라는 걸 폭로한다. 작품 제목은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 12월 9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에서 개인전 'The Bull's Eye'를 여는 네덜란드 작가 폴케르트 더 용(40)은 웃음 이면의 절망을 파헤친 피카소의 '광대'에서 영감을 받아 이 조각을 만들었다.

텅 빈 의자와 그 아래 종이가 흩어진 최재은의 2012년작 설치작품‘나는 종이로서 만족한다’. 의자와 마주한 벽엔 작가가 일상에서 얻은 감흥을 유럽의 고서(古書) 면지에 시 한 줄씩 적은 작품‘만물상’이 걸려 있다.

더 용이 주로 작품 재료로 사용하는 폴리우레탄이라는 소재엔 무분별한 화학물질 사용으로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의 비도덕성에 대한 비판의 의미가 담겨 있다. 작가는 말한다. "내 관심사는 '도덕성' '절망' '공포' 같은 인간의 내면이다. 전쟁 장면을 그려 폭력과 절망, 공포의 극단에서 희망을 암시한 고야(Goya)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가로서 좇는 목표다." (02)723-6190

왜 정신성인가

현재 국내 미술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신성'에 대한 관심은 경기 불황, 지나친 경쟁으로 피로감을 느끼는 사회 분위기에 힘입은 것이라는 분석이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니쉬 카푸어 같은 종교적 작가, 이우환·김수자 등 '명상'과 '치유'를 테마로 하는 작가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전투적인 것에 지친 사람들이 미술을 통한 치유를 바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