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은 꿈의 공간'이라는 말은 이런 작품이 있기에 생겨났다. 지난 13일 경기도 안산에서 국내 초연 개막한 마임극 '속삭이는 벽<사진>'은 달콤한 꿈의 파도를 타고 유영(游泳)하는 75분의 환상극이다.

작품을 먼저 기억하게 하는 것은 '핏줄'이다. 빅토리아 티에리 채플린(61)이 연출하고, 그녀의 딸 오렐리아 티에리(41)가 출연한다. 이름을 듣고 누구나 떠올릴 그 '채플린'이 맞다. 빅토리아는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의 딸이자 극작가 유진 오닐의 외손녀. 빅토리아가 프랑스 연출가인 장 밥티스트 티에리와 결혼해 낳은 딸이 오렐리아다. 오닐은 빅토리아의 모친인 딸 우나가 자신과 동년배인 채플린과 결혼하자 의절했다. 모녀(母女)가 뭘 해도 채플린과 오닐의 꼬리가 따라붙는다. 오렐리아는 매번 "홍보 문구에 채플린을 언급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에 걸린 공연 포스터에는 '채플린가(家)의 작품'이라고 첫 줄에 박혀 있었다.

'속삭이는 벽'은 모녀의 두 번째 합작품. 서커스·마임·마술이 경계 없는 꿈처럼 뒤섞여 있다. 꿈이 꾸는 자의 것이듯, 줄거리는 보는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여주인공은 종이 상자와 커튼 천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산다. 쾅쾅쾅! 누군가 집 문을 두드린다. 천장이 새는지 흰 가루가 쏟아진다. 철거 전문가가 들어와 서명을 요구한다. 상자 안으로 사라졌던 그녀는 다른 집 창문으로 다시 나타난다. 모든 출입구가 그녀의 통로가 된다. 집도 배도 돌연 사라졌다 불쑥 나타난다. 그녀는 허물어졌다가 세워지는 집들의 벽과 창문을 뚫고 나와 관객의 무의식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속삭인다. "극장에서는 이렇게 눈을 뜨고 꿈을 꿀 수 있어요."

초반부터 관객을 사로잡는 장면은 공기방울 포장재 버블랩(bubble wrap)의 변신이다. 꿈틀꿈틀 무대를 기어나온 수십 미터 버블랩이 서서히 부풀어올라 집채만 한 괴물이 된다. 전설 속 설인(雪人)이 된 괴물은 여주인공에게 키스하려다 버블랩으로 휘감아버린다. 군데군데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화첩을 넘겨보는 듯하다. 에른스트가 분신(分身)으로 여겼던 뾰족 부리 새도 나온다. 극장을 나설 때면 아쉬운 잠에서 깬 기분이다. 그녀는 어디에 갔을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8~20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02)2005-0114, 24~25일 부산 영화의전당, (051)780-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