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에 상륙한‘행운의 편지’에 대해‘엄중처벌’하겠다는 경찰 방침을 크게 보도한 조선일보 사회면 기사(1935년 7월 9일자).

"편지를 바든 이는 또 24시간 안에 각각 열 사람에게 이 편지를 전하여야 하며… 받고서 다시 전하지 아니하면 곳 악운이 닥처온다…."

미국에서 시작됐다는 '행운의 서간(書簡)'이 일본을 거쳐 조선까지 상륙했다(1926년 7월 22일자). 근대 우편 제도에 편승한 이 괴(怪)편지는 1922년쯤 이 땅에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지만, 조선일보에는 1926년 처음 보도됐다. 말이 행운의 편지이지 실상은 '협박 편지'였다. 첫 기사에선 '빈말이라도 '행운'을 전하는 것'아니냐며 '인류의 협동적 정신에 얼마간이라도 공헌하는 바이 잇슬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썼지만(1926년 7월 22일자) 이내 사회문제로 도마에 오른다.

경기도 장단(長湍), 전북 김제(金堤), 황해도 해주(海州) 등에서 우편 물량 대부분을 이 편지가 차지하자, 경찰은 "편지가 시키는 대로 다른 곳에 발신하면 엄중 처벌한다"고 경고하며 단속에 나섰다(1926년 7월 28일자, 8월 6일자, 8월 11일자). 조선일보도 이 편지가 허황된 미신임을 거듭 알렸다. "나는 행운의 편지 한 통을 찢어버린 날, 노벨상 수상 통지를 받았다"는 노르웨이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운세트 부인'(Sigrid Undset)의 말까지 전했다(1930년 7월 17일자).

그런데도 행운의 편지는 해주·안악(安岳) 등 황해도를 거쳐 경기도 이천, 충남 아산 등지로 유행병처럼 퍼지더니(1926년 8월 6~26일자) 1935년엔 경성 조선일보사까지 배달됐다. 조선일보는 '이 따위의 흐리뭉덩하고 웃지 안흘 수 업는 소위 행운의 편지가 대체 어느 곳으로부터, 어떤 작난꾸럭이가 시작해 내인 것인지?… 식자(識者)로서는 리해 못할 일'이라고 목청을 높였다(1935년 7월 9일자).

피라미드식 편지 발송만 요구하던 행운의 편지엔 '사회 제도의 불합리함을 역설하는 적화(赤化) 선전문'도 끼어들었다(1926년 8월 28일자). 1935년엔 경제 현실을 비판하며 '불경기 퇴치'를 부르짖는 편지가 '여러 곳에 재발송하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협박과 함께 나돌아 경찰을 긴장시켰다 (1935년 10월 11일자). 마음 약한 여학생들이 행운의 편지에 잘 빠져드는 경향을 보이자(1939년 7월 28일자), 교육 행정을 맡은 총독부 학무국은 '이런 맹랑한 편지를 받으면 교장에게 신고하라'는 등 당부 사항 3개 항을 발표했다(1939년 8월 24일자). 하지만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 미신 같은 편지는 근절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