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권위의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는 해마다 한 영화인을 선정해 회고전을 연다. 영화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이에 대한 헌사(獻辭)인 셈이다. 다음 달 4일부터 시작하는 17회 부산영화제는 회고전 주인공으로 배우 신영균(申榮均·84)을 선정했다. 1960년 '과부'로 데뷔, 1978년 '화조'까지 총 294편을 찍고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그는 굵은 선과 남성미,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1960~70년대 최고 스타로 군림했다. 이 노배우를 14일 서울 명동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했다.

―회고전하면 왠지 은퇴하신 분들이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나는 은퇴라는 얘기는 될 수 있으면 안 하려고 해요. 영화배우라는 게 나이를 먹는다고 못하는 게 아니잖아요? 죽는 것이 은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지난달 50년 만에 서울대 동문 연극 무대에 섰습니다.

"신부 역할인데 대사가 많더라고.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외워서 했더니 대본이 아주 헌 종이가 됐어(웃음). (연기)감은 살아있는 거 같아."

배우 신영균씨가 14일 서울 명동 사무실에서 96년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됐을때 예술인 후배들이 준 기념 트로피와 가족사진 등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1960년 치과 개업 중 30이 넘은 나이에 영화에 데뷔했습니다.

"그전에 연극을 했었죠. 의사를 하면서도 연기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나를 끌어낸 거죠. 그리고 당시 내 병원에 전에 같이 연극을 했던 배우들이 치료받으러 왔었는데 윤일봉씨는 홍콩으로 촬영 간다고 하고, 최무룡씨는 지프차를 타고 와. 그게 굉장히 부럽더라고(웃음)."

―스스로 대표작을 꼽는다면.

"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받은 '연산군'처럼 수상작들에 애착이 가죠."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가장 말을 잘 타는 배우일 것"이라고 하셨던데.

"우리 때는 영화에 쓸 수 있는 게 경마장 말밖에 없었어요. 그것으로 부족하면 종로에서 마차 끌던 말까지 동원했거든. 훈련이 안 된 말들이니 배우들이 많이 다쳤죠. 내가 승마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연산군'을 찍었는데 그때 말이 경마장 말이야. 촬영 장소가 비원(창덕궁)이었는데 내가 올라타니까 말이 그대로 뛰쳐나가 버렸어요. 왜 비원 문들이 낮잖아요. 말이 거기로 냅다 들어가는데, 내가 스포츠 감각이 있어서 머리를 빨리 낮췄으니까 괜찮았지 그렇지 않으면 문 윗부분에 머리가 부딪혀서 그대로 갔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웃음)."

―전쟁 영화 전투 신에서는 실제 탄환을 쐈다고 하던데요.

"전투신에서 라이캉이라는 걸 터트려 총탄 쏘는 소리를 냈는데 그게 효과가 안 나니까 욕심 있는 감독들은 실탄을 쏘라고 해. '5인의 해병대'때가 그랬어요. 감독이 '라이캉 안 되겠다. 실탄을 쏴라' 그러더니 우리한테는 무조건 뛰어라 하고선 모래밭에 막 실탄을 쏘는 거예요. 그게 자칫 돌에 맞으면 유탄이 되는 거지. '영화배우가 영화 찍다 죽는 건 영광이다' 하는 각오 아니면 정말 못했어."

부산영화제 회고전에서 상영될‘미워도 다시한번’(위)과‘빨간 마후라’.

―최무룡, 김진규씨하고 라이벌이셨죠. 경쟁 심리가 있었나요?

"없다고 볼 순 없죠. '연산군'만 하더라도 두 사람 모두 하려고 했으니까. 근데 신상옥 감독이 '이건 신영균이 거다'라고 한 거지."

―많은 여배우와 공연했습니다. 저마다 특징들이 있겠죠?

"최은희씨는 연극을 많이 하신 분이라 무게와 깊이가 있었죠. 김지미씨는 연기 경험은 없었지만 미모가 있으니까, 또 열심히 했고. 윤정희·문희·남정임씨는 경쟁이 아주 심했어요."

―'신영균 연기'를 자평하신다면.

"멜로드라마에 예쁘게 나오고 그런 건 못할 거 같아요(웃음). 남자로서 카리스마를 갖고 끌고나가는 역할은 맞는 거 같고."

―별명이 '짠돌이'라고 들었습니다.

"돈을 막 쓰지 않는 거죠. 제가 선배들 생활을 다 봤거든요. C선배 같은 경우 출연료 받으면 새 돈으로 준비해 기생집에 가 막 뿌린다는 거야. 그런 낭비를 할 필요가 뭐 있어요."

―"영화로 돈 벌고서도 영화에 돈을 안 썼다"고 하는 분들도 있던데요.

"그런 얘기 나도 들었어요. 내가 영화 제작을 딱 한 번 했는데 해보니까 배우 하면서 할 건 안 된다, 제작은 하나의 사업인데 배우가 할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2010년 500억대 자산을 출연,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아깝지 않았나요?

"돈 안 아까운 사람이 어딨어요, 더구나 '짠돌이'라는데(웃음). 하지만 자기 책임이라는 게 있잖아. 후배들을 위해 뭔가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죽기 전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꼭 하고 싶다"고 한 인터뷰를 봤습니다.

"변함이 없어요. 자주 하는 말인데 '노인과 바다' 같은 걸 제주 바다에서 한번 찍고 싶어요. 얼마 전에 특수부대 출신 할아버지와 성범죄를 당한 그의 손녀에 관한 작품이 들어왔는데 소재는 괜찮았지만 구성이 잘못돼 있길래 못하겠다고 했지. '빨간 마후라'를 다시 만들겠다면서(정지훈 주연 'R2B') 초반에 잠깐 출연해달라는 제안도 있었는데 역시 시나리오가 그래서 안 했어요. 사회에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작품 한번 해보고 싶어요."

"바람 절대 안 피운다 약속하고 배우 됐는데… 유혹은 많더라고요"

신영균 연기 인생 네 번의 전기

신영균의 연기 인생에는 크게 네 번의 전기(轉機)가 있었다.

①서울대 치대 입학 "고등학교 때부터 전문 연극단원이 됐어요. 고교 졸업하고 연극배우로 살겠다고 작정하고 연극단을 따라 전국 공연을 다녔는데 겨울에 트럭을 타고 가다 큰 사고가 난 거야. 바퀴에 (단원 가족인) 어린아이가 깔리고 아우성이 들리고…. 그때 '아, 연극배우만 해선 장래가 없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마음먹고 공부해 서울대 치대에 들어갔지."

②영화 데뷔 "1960년 치과 개업 중에 '과부'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어요. 아내가 강하게 반대했어. '바람피우는 거 아니냐' 그런 거였는데 '절대 안 피운다'고 약속하고 설득했지. 그랬는데 솔직히 여자들 유혹 많이 받았어요(웃음).내 주변에도 두 집 살림하는 배우 많았다니까. '과부'할 때 난관이 또 하나 있었어요. 머슴역이라 머리를 깎아야 된다는 거야. 그때만 해도 의사 계속할 줄 알아서 '의사가 머리 깎고 해도 괜찮은가' 생각이 들었지. 그래도 역할이 워낙 좋으니까 '에이 깎자'하고 했어요."

③극장 오너 "1970년에 희극 하던 김희갑씨하고 영화를 만들었는데 추석 때라 개봉관을 잡질 못했어요. 그때 서울에 개봉관이 10개밖에 없어서 경쟁이 치열했거든.
우리가 국도극장에 걸고 싶어서 김희갑씨가 아는 (권력)실세한테 부탁해 미리 잡혀 있던 걸 취소하게 했어요. 그러니까 극장 사장이 엄청 화를 냈고 우리가 집에 찾아가 빌었는데도 사장이 '앞으로 두 사람 나오는 영화는 절대 안 틀겠다'는 거야. 사장 집을 나오면서 '극장 하나 사야겠다' 마음먹었고, 77년 명보극장을 산 거지."

④은막을 접다 "1978년 '화조'가 마지막 출연이에요. 그때 검열이 아주 까다로웠어. 여자와 키스해도 안 되고 사람 죽이는 것도 안 되고 권총은 물론 나올 수 없고. 그러니 영화가 재미가 있나. 관객도 떨어지면서 나도 자동적으로 (영화에서) 멀어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