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들어온 책 2690권'.

31일 오후 서울 종로2가 한 건물 지하에 있는 알라딘 중고 서점. 계단 입구에는 당일 입고된 수량을 알리는 팻말이 붙어 있다. 190평(628㎡) 남짓한 매장 안은 40~50명의 이용객으로 북적였다. 카운터는 책을 '파는 곳'과 '사는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사는 곳 못지않게 파는 곳도 분주한 것이 이 서점의 특징. 서너 명이 손때 묻은 책을 들고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이곳은 나이트클럽이었다. 지금은 영원(永遠)을 꿈꾸는 중고 책 4만여권이 분야별로 고여 제2의 삶을 고대하고 있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고 서점

헌 책을 사고, 파는 것도 가능한 중고 서점의 성장이 눈부시다. 2008년 2월 인터넷에서 먼저 중고 책 판매를 시작한 알라딘(대표 조유식)이 오프라인 매장까지 냈다. 작년 9월 종로점을 시작으로 올 초 부산점과 신촌점, 지난 5월과 7월엔 경기도 분당점과 강남점을 차렸다. 유동인구가 풍부한 알짜배기 자리만 골라서 낸 셈. 알라딘 측은 "중고 책일수록 책 상태를 눈으로 직접 본 뒤 사고 싶어하는 고객이 많아 오프라인 매장까지 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사원 김태우(36)씨는 '사흘에 한 번꼴로'중고 서점에 들른다. 다 읽은 책은 갖다 팔고, 거기서 받은 돈으로 다른 중고 책을 또 산다. "책 판 돈으로 다시 책을 사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서오현 종로점장은 "주말이면 여행용 가방, 종이상자, 장바구니에 수십 권씩 가져와 파는 고객이 많다"고 덧붙였다.

'헌책방'과는 다른 개념의 중고 서점이 최근 서적 유통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달 31일 오후 알라딘 중고 서점 종로점에서 사람들이 중고 책을 고르고 있다.

사람들이 중고 서점을 찾는 이유

기본 골격은 헌책방과 비슷하지만 그냥 헌책방이라 하기엔 새로운 점이 많다.

일단 교통이 편리한 시내 중심가에 있다. 책을 팔면 바로 현찰을 받는데, 주인이 눈대중으로 가격을 매기는 기존 헌책방과 달리 바코드를 이용해 객관적 기준에 따라 가격을 측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6개월 이내 신간 베스트셀러는 정가의 50%까지 값을 받을 수 있어서 출간된 지 하루 만에 '중고'로 들어오는 신간도 꽤 있다. 중고 서점에 들어온 책은 매장 내 코너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에 1~2일간 놓인다.

알라딘이 3년간 온라인을 통해 중고 책을 거래했을 때 보유 중고 책은 10만여권이었다. 하지만 오프라인 매장을 낸 이후 불과 1년 새 보유량은 20만여권(전점)으로 수직 상승했다. 알라딘 측은 "판매량을 정확히 공개할 순 없지만 매일 2000~4000권의 중고 책이 전점에 들어오고 그만큼이 다시 팔린다"며 "임대료가 높아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정도"라고 했다.

중고 서점에 책을 파는 사람이 느는 이유는 패스트패션(최신 트렌드를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유통시키는 옷)처럼 패스트북(fast book)의 유행도 한몫을 하고 있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베스트셀러의 주기가 짧아지면서 자기계발서, 소설 등 트렌드 책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고 했다. "독자 입장에서 오래 소장할 만한 책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한편 중고 책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내뱉는 말은 "새책 같은 중고 책"이다. 대학생 이미정(22)씨는 "표지만 약간 헐고 내용물은 낙서나 구김 등이 거의 없어 횡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헌책에 대한 편견을 깼다"고 말했다.

알라딘은 낙서가 5쪽 이상이거나 젖은 흔적이 있으면 매입을 안 한다. 초·중·고 참고서, 동화책 전집류, 주간·계간·월간 등 잡지류도 안 받는다. 어린이·청소년 책이 가장 인기(전체 판매량의 30%)있고, 소설 등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도 잘 팔린다. 알라딘 중고 서점 재고 중 신간 비율이 4.6%밖에 안 되는 이유는 6개월 이내 신간일수록 들어오자마자 나가기 때문이다. 매년 19% 정도였던 중고 책 판매 성장률이 올 들어 34%로 급증했다.

중고 책 가격은 신간 출간 시점이나 책 상태 등에 따라 다르지만 1000원대부터 정가의 절반 이하다. 회사원 윤정환(48)씨는 "다른 인터넷 중고시장의 할인 폭은 10% 정도로 크지 않고, 절판된 책을 살 경우 판매자가 택배비(2500원)를 전가해 정가보다 비싸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추억과 향기가 배제된 중고 서점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추억 속 헌책' 같은 '헌'책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헌책방의 보편적 임무는 고서 희귀본을 발굴 및 평가하고, 절판본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헌책방 책에는 손때와 낙서가 있고, 책갈피에서 뜻밖의 물건도 나온다. '친구야 생일 축하한다, 윤희가'처럼 책이 거쳐온 손길을 알려주는 사인 등은 헌책만이 가진 이력서다. 뽀얗게 쌓인 먼지, 헌책 특유의 냄새 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중고 서점에는 이런 분위기가 없다. 출판평론가 표정훈 한양대 교수(기초교양교육원)는 이를 "'문화적 분위기'가 있고 없고"로 구별했다. "알라딘 중고 서점은 한 번 사용됐다 사장될 뻔한 책을 2차 시장에 내놓아 한 번 더 유통되게 하는 장터라고 보면 딱 맞습니다." 표 교수는 "중고 서점은 중고 책을 새로운 상품 유통의 한 경로로 바라본다. 헌책을 다루는 헌책방과 달리 중고 서점은 신간을 선호하기 때문에 다루는 '물품' 자체가 다르다"며 "대형 마트가 동네 상권을 잠식한다기보다는 도리어 기존 오프라인 대형 서점과 경쟁한다는 게 더 맞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알라딘 중고 서점 매장은 지역을 불문하고 교보·영풍문고 등 대형 서점과 가까운 데 있다. 새책을 사기 전 인근 중고 서점에 먼저 가 보고, 마땅한 중고 책이 없으면 대형 서점으로 가는 식이다.

이 때문에 출판사에 알라딘 중고 서점은 '몹시 곤란한 존재'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신·구간 안 가리고 정가의 50% 아래까지 값을 내려 판다. 바로 어제 출간된 책이어도 독자에게 한 번 갔다가 돌아 나오면 바로 중고가 되기 때문에 도서정가제(발간 18개월이 지나야 할인 판매 가능)마저 무색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