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아가씨
김미선 지음ㅣ마음산책ㅣ224쪽ㅣ1만3000원
"뭐, 유행이 거기서 다 나오다시피 했지."
일제강점기 종로 화신백화점의 미장부와 엽주미용실에서 일류 미용사로 이름을 날렸던 임형선(92)씨 말처럼, '거기'는 유행의 상징이었다. 미용·의상 전문가들의 필수 견학 코스였다. 일제 당시 '본정통'으로 불리던 오늘의 명동. 일제강점기부터 20세기 말까지, 한국 유행의 본산은 명동이었다. 1920~30년대 근대 조선을 연구해온 여성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이상(李箱)의 명동' '명동백작 이봉구의 명동' '박인환의 명동'이 아닌 '여자들의 명동'을 집중 재조명한다.
서울 남산 기슭, 가난한 양반과 하급 관료들이 살던 '남촌'이 소비 공간 명동으로 부상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서울역과도 가까운 이곳에 조선 통감부와 총독부를 잇달아 설치하고 상권을 본격 개발했다. 1910년 이미 92개에 이르던 명동의 일본인 상점들은 양복점과 양화점 등 신문물에 '세모대매출(歲暮大賣出)' 같은 깃발을 내건 마케팅으로 조선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광복 후에도 영화를 이어가던 명동은 6·25전쟁 후에도 가장 먼저 재건됐다. 역시 '멋'에 대한 동경이 원동력이 됐다. 1954년 '한 양장점'이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7개의 양장점이 추가되더니 1971년에 이르면 명동의 양장점은 150여개에 달했다. 미용실도 20곳이 넘었다. 저자는 "명동은 여성들에게 해방구로서 존재했다"고 말한다. 유독 패션과 미용산업이 명동을 점령한 건 미군 PX(군대 매점)가 명동 한복판에 자리 잡으며 미국의 패션 잡지 등이 명동 골목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재와 미용 기술은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이 여성성을 간직한 채 비교적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술이었다.
당대의 일류 양장사·미용사와의 인터뷰, 다양한 자료섭렵을 통해 그려낸 전성기 명동의 풍속도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 양장점 직원들은 자기네 가게가 "'밤 직장'을 다니는 여성이 오지 않는 고급 양장점"임을 강조했지만 1950년대 양장점 고객으로는 '양공주'가 제일 많았다. 그다음은 연예인, 고위층 부인, 여대생이었다. 이들은 명동 거리를 활보하며 최신 유행을 따라 했다. 여성지와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명동으로 유입된 서구 스타일은 당시 패션 리더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특히 영화 '로마의 휴일' 속 오드리 헵번의 플레어 스커트와 짧은 단발이 큰 인기를 얻었고 비단 블라우스와 드레스, 모자 달린 플레어 코트, 자루 형태의 색 드레스도 유행했다. 미용실 풍경도 별났다. 커튼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고, 의자에 앉으면 1~80번까지 표시가 있는 스코어북이 나왔다. 여기에 사인하면 손님은 그 번호 순으로 면도, 머리 감기, 파마 등 시술을 받았다.
명동을 여성의 시각으로 봤다는 데 이 책의 의의가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명동에서 웃고 운 여성들에게선 악착같은 생의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중반에 이르면 명동이 가진 장소성에서 벗어나 국내 양재와 미용 역사 전반을 살피는 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 다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