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오후 5시 30분쯤,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한 건물 주차장에서 이모(여·32)씨가 빨간 마티즈 차량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태로 발견됐다. 이씨의 팔뚝과 손등, 팔목 등에는 벌집처럼 수십개의 주삿바늘 자국이 선명했다. 차량 안에서는 피 묻은 주사기와 유리로 만든 빈 주사제 앰풀이 널브러져 있었다. 수면마취제 프로포폴이었다. 이씨는 "제발 프로포폴을 끊게 해달라. 이 약을 끊으려고 자살까지 시도했다"면서 흐느꼈다고 경찰은 전했다. 프로포폴 투여 시나 깨어날 때 일부에서 황홀감이나 몽상 등의 증상이 생길 수 있다. 이씨는 프로포폴에 정신적으로 중독된 것이다.

유흥업소 출신의 이씨는 2007년 성형수술을 받으면서 프로포폴을 처음 맞았다. 그는 수술 후 "한숨 자고 났더니,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2009년과 2010년 사이 병원을 통해 집중적으로 프로포폴을 투여받았다. 프로포폴을 맞기 위해서 일부러 지방흡입술 등 소규모 성형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씨는 "당시 일주일에 서너 번 치료받은 적도 있다"며 "한번 치료를 받는 데는 50만~100만원 정도가 들어, 이 기간에 모두 5억~6억원 정도를 쓴 것 같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이씨가 약품보관실 보관함을 열고 프로포폴을 훔쳐 티셔츠 안쪽에 숨기는 모습.
조수석 바닥에 피묻는 타올과 주사기 바늘이 떨어져 있다.
차량에서 발견된 프로포폴 빈병 3점과 투약 시 사용한 주사기, 투약 과정에 피가 남아있는 호스.

이씨의 프로포폴 남용에 제동이 걸린 것은 작년 2월. 식품의약품안전청이 프로포폴을 마약류(향정신성의약품)로 지정한 시점이다. 치료 목적 이외에는 사용이 통제되면서 프로포폴을 쉽게 맞을 수가 없게 되자, 이씨는 이 약물을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6월 29일 강남구 신사동 한 성형외과에 손님을 가장하고 찾아가, 원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약품 보관함에 있던 프로포폴 20mL 앰풀 15개를 훔쳐 달아났다. 7월에도 강남 성형외과와 내과에서 프로포폴 3병을 훔쳐 상습투약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이씨의 손등과 손목에 남아있는 프로포폴 투약 흔적.

프로포폴 남용이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프로포폴 맛에 중독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맞거나, 마약류 지정 이후에도 일부에서 피로해소제라는 이름으로 본래 사용 목적 이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발생한 산부인과 의사 시신 유기 사건에서도 피해 여성은 평소 의사 김모씨를 통해 프로포폴을 맞아 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병·의원에서 프로포폴을 쓰면 사용량과 재고량 등을 철저히 기록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마약관리법 위반이다. 하지만 프로포폴 관리가 허술하고, 쓰고 남은 것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프로포폴이 유출되고 있다. 식약청이 지난 5월 병의원 프로포폴 관리 실태를 점검한 결과, 13개 병·의원에서 15건의 관리 위반 사례가 적발됐다. 지난해 12월에는 17곳에서 관리 부실 사례가 발견됐다.

강남 한 성형외과 김 모 원장은 "2~3년 전만 해도 한 번에 10만~20만원 정도 받고 프로포폴 주사를 놔주는 의원이 많았다"며 "그때 프로포폴에 중독된 상당수 사람이 요즘도 음성적인 경로로 맞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내 프로포폴 생산액은 2009년 173억원, 2010년 131억원, 마약류로 지정된 2011년에는 170억원이다.

의학적으로 프로포폴은 양날의 칼이다. 수면 유도가 1~2분 정도로 빠르고, 진통 효과가 뛰어나며, 약물 주입을 끊으면 환자가 수면 상태에서 빠르게 회복된다. 이 때문에 수면 내시경이나 전신마취가 필요 없는 '외래 수술'에서 널리 쓰인다. 하지만 프로포폴이 과다 투여되거나 민감 체질인 경우, 호흡과 혈압이 급속히 떨어져 위험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이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해 프로포폴 관련 사망으로 확인된 사례는 36건. 그 중 16건은 의료 시술 중 프로포폴을 맞은 환자가 사망한 경우다. 나머지 20명은 자살에 이용하거나, 자가 투여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이 중 대다수(75%)는 프로포폴을 접하기 쉬운 의사, 간호사 등 병원 관련 종사자였다. 사망자 3명은 비(非)의료인으로, 음성적인 유통경로로 프로포폴을 구해 맞다가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프로포폴(propofol)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정맥 주사용 마취제로 일명 수면마취제로 불린다. 내시경 시술이나 전신마취를 하지 않고 환자를 재워서 간단한 수술을 할 때 주로 사용된다. 마취 유도 시간이 짧고 마취에서 잘 깨어나 간편하게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