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여순사건의 와중에서 구례는 좌·우익의 갈등속에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참화가 지난 듯 했으나 전쟁이 터졌다. 1950년 7월 24일 전남 구례경찰서에서 당시 안종삼 서장이 과거 좌익운동 전력이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석방했다. 보도연맹원들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 '생환(生還)'했다. 안 서장은 좌익의 봉기를 막기 위해 연맹원들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62년이 흐른 지난 24일 구례경찰서에서 구례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동상을 세웠다.
폭력과 보복, 갈등의 고리를 끊어보고자 했던 이와 같은 결단은 매우 희귀한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기자는 이 사례를 2000년 접했다. 당시 구례 곳곳을 취재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 이름을 '전남경찰사'에서 확인했다. 그해 기자가 쓴 '큰 산 아래 사람들'에 그 사실을 처음 활자화했다.
구례사람들은 지리산을 '큰 산'이라 불렀다. 그 '큰 산'아래 사람들은 역사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었다. 구례의 사정을 따라가보자.
1947년 3월 1일 구례군 토지면 파도리. 불법으로 규정돼 지하로 숨어든 사회주의 세력이 '해방만세대회'를 열기 위해 나서던 때였다. 당시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2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중앙의 좌파세력들은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3·1절집회'를 시도하고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그날 제주도 제주읍에서도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이듬해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났다.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의 1개 대대가 제주도 파병에 반대, 봉기했다. 1948년 '여순사건'이었다. 제14연대 반란군은 여수, 순천, 보성, 광양, 승주(지금은 순천) 등 전남동부를 빠른 속도로 휩쓸었다. 그 반란군이 10월 23일 순천 삽재와 백운산을 넘어 구례에 들어왔다. 구례군 간전면과 토지면 문수리를 거쳐 순식간에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구례읍 점령을 시도했다. 포위망을 뚫고 지리산을 택한 것은 '큰 산'이 은신처로서 제격이었기 때문. 반란군들은 광범위한 유격전구를 구축, 1950년초까지 토벌군과 교전했다. '빨치산'이라 부르는 유격대로 전환했다. 이 유격대와 토벌군 사이에 주민들이 놓여있었다. 유격대가 양식을 조달하기 위해 출몰하는 횟수만큼이나 많은 전투와 사상자를 냈다. 유격대는 봉화가 오른 날 밤이면 민가에 내려와 양식과 가축을 '보급투쟁'해 갔다. 산으로 짐을 나르지 않는 주민들을 유격대는 사살하기도 했다.
이 때 '토벌군' 전투사령부는 남원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토벌군이 반란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집단 생포되기도 했다. 토벌군 부대가 기습 당하고 부대장이 자살하기도 했다. 구례는 '공포'분위기였다. 좌익의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구례경찰서에 끌려갔던 72명이 1948년 11월 18일 경찰서에서 집단 총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밤은 반란군이 구례읍내 진입을 시도하며 토벌군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희생자들은 구례읍 봉성산에 집단 매장되었다. 희생은 노고단 아래 산동면 일대가 심했다. 고지대에 마을이 많아 반란군(유격대)이 '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특히 산수유가 많은 고지대 마을들에서는 온전한 집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밤'이 지나면, 토벌군의 '낮'이 찾아왔다. '낮'이 지나면 또 '밤'이 찾아왔다.
'6·25' 이전에 이렇듯 구례는 이미 '전쟁'에 휩싸였다. 그리고 '6·25'. 안종삼 구례서장은 이미 '전쟁'을 통해 그 참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