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북한에서 남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방한파(訪韓派)'가 득세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2005년 9월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당시 북한 응원단원으로 한국에 왔던 리설주(24)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부인이다. '김씨 왕조(王朝)'의 왕비가 된 셈이다.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최고 실세 중 한 명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던 2002년 10월 북한 경제시찰단(18명)의 일원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삼성전자와 현대중공업, 제주도와 남산 등을 8박 9일간 둘러봤다. 2004년 '분파 조성' 혐의로 좌천된 적도 있지만 2006년 복권돼 김정은 후계 체제 구축에 앞장섰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은 장성택 방한을 전후해 경제개선 조치를 취한 바 있다"며 "현재 김정은 체제가 변화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그의 방한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장성택의 핵심 측근인 문경덕 평양시당 책임비서도 장성택과 함께 서울에 왔었다.
지난 4월 당 경공업부장으로 승진한 박봉주도 2002년(당시 화학공업상) 경제시찰단 멤버였다. 그는 방한 이듬해 내각 총리에 올라 북한식 경제개혁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보수파인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의 반발에 밀려 2007년 4월 실각했지만, 김정은의 공식 등장을 한 달 앞둔 2010년 8월 경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
반면 박남기는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떠안고 2010년 초 총살됐다. 대북 소식통은 "최근 인민경제 향상을 강조하는 김정은이 박봉주를 중용한 것은 남한 경제를 둘러봤고, 4년간 경제 개혁을 추진했던 그의 경험을 활용하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했다. 김정은은 지난 4월 첫 공개 연설 당시 "인민의 허리띠를 다시는 졸라매도록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남한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방한파들은 북한의 변화 필요성을 절감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안보부서 당국자는 "북한 인사들이 남한에 왔을 때 우리 산업시설과 서울 야경 등을 꼭 보여줬던 것은 스스로 뭔가를 느끼도록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김양건 대남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은 김정일 말년 수행원 명단에서 자주 빠졌지만 최근 수행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는 2007년 11월 서울에서 노무현 대통령, 2009년 8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각각 만난 적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서울에 왔던 김기남 당비서와 '남북회담 일꾼'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도 건재하다.
군부에선 2000년 추석 때 김정일의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에 왔던 박재경(대장) 총정치국 선전부국장이 대표적이다.
김정은 부인 리설주의 데뷔 무대였던 지난 6일 모란봉악단 공연에서 미국 영화 록키의 주제가와 만화영화 캐릭터 미키마우스가 등장한 것도 한국과 중국을 모두 목격한 리설주의 경험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방한파의 운명이 모두 순탄한 것은 아니다. 1992년 7월 경제팀을 이끌고 서울에 왔던 김달현 정무원 부총리는 이듬해 지방공장 지배인으로 좌천됐다. 평양에 돌아가 '개방'을 건의했다가 김정일에게 찍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1월 극비 방한했던 류경 보위부 부부장은 간첩으로 몰려 총살됐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 고위 인사에게 방한 경험은 양날의 칼"이라며 "변화 분위기에선 중용되지만 '수령'의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 반동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