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젊었을 때 파리에서 살게 되는 행운이 있다면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당신의 남은 일생 동안 어디를 가든 당신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

192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 속 문구다. 우디 앨런도 이런 심정으로 41번째 작품 '미드나잇 인 파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1920년대 파리에 대한 애틋한 동경이자 유쾌한 찬가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지만 문학 작품을 쓰고 싶어하는 주인공 길(오언 윌슨)은 부유하지만 속물적인 약혼녀의 가족과 파리에 가게 된다. 어느 날 밤 1920년대의 파리로 시간여행을 가게 된 그는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거투르드 스타인 등 당대의 예술가들을 만나고 매력적인 여인 아드리아나(마리옹 코띠아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길의 시간여행엔 아무런 논리적 설명도 따르지 않지만 관객들은 여기까지 신경 쓸 틈이 없다. 화면 구석구석에 등장하는 1920년대 파리의 예술가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권투로 한판 붙어보자는 '마초' 헤밍웨이나 바람둥이 피카소 등 엉뚱한 모습의 역사적 인물들에게 묘한 쾌감마저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너무 수다스럽거나 젠체한다고 앨런의 영화를 탐탁지 않게 여긴 이들도 재치있고 지적이면서 귀엽기까지 한 이번 작품을 거부하긴 힘들 것이다.

이 영화는 앨런의 전작(前作)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와 닮았다. 남루한 삶을 잊기 위해 극장을 찾는 여자(미아 패로우)가 영화 속 인물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이 영화와 설정만 비슷한 게 아니라 결말도 비슷하다. 욕망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견디기 위해 사람들은 환상을 만들어내지만 현실이 돼버린 환상 속에서도 욕망은 여전히 좌절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올해 희수(喜壽·77)를 맞은 앨런은 이 영화로 '불만족스러운 현재도 알고 보면 꽤 재밌는 세상'이라며 관객들을 다독여주는 것만 같다.

5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것이 포인트

#대사
"예술가가 할 일은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존재의 공허함에 대한 해독제를 찾는 것이다."(평론가 거트루드 스타인이 길에게 하는 말)

#장면
길이 아련하고도 낭만적인 1920년대와 마주하는 첫 장면. 파티장에서 작곡가 콜 포터가 피아노를 치면서 '렛츠 두 잇'을 부르고 스콧·젤다 피츠제럴드 부부가 춤을 추고 있다.

#해외평
'좋아하지 않을 데가 없는 영화'(시카고 선 타임스의 로저 애버트)

#이런 분들 보세요
'그때가 좋았지'라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