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신경학자인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보면 뇌신경 손상과 관련된 질병을 앓는 특이 환자들의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가령 자폐증을 앓는 오클레이는 돼지 울음소리를 듣고 단번에 'G샤프'라고 이야기해주는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다. 파킨슨병에 걸린 마틴은 9권으로 이루어진 '그로브 음악가 사전'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으며, 언청이 레베카는 천부적인 시인이지만, 9 다음이 10이라는 기초적인 숫자 배열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닥에 쏟은 콩알의 숫자를 맞추어내는 쌍둥이 형제가 있다. 100개, 혹은 2000개를 쏟는다 해도 이들은 정확하게 그 숫자를 맞출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콩알은 111개. 37이 세 개 모였어." 이 저능아 천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약수로 이루어진 거대한 숫자판이다.
마치 잘못 쓴 소설의 활자 덤불 속을 헤집고 뛰쳐나온 사람들처럼, 이 환자들은 여전히 '상상력 과잉'이라는 문학적인 질병을 뒤집어쓴 듯 보인다. 편견 없이 본다면, 세상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즐비하다. 내가 만약 어떤 사람에게 '나는 자기 부인을 모자로 착각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자기 발을 구두로 착각하는 사람이, 멀쩡하게 수십 년 동안 음악학교의 교사직을 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말이다. 저능아가 어째서 뛰어난 시인일 수 있었고, 눈물 나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은 신경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장애를 신이 만든 실패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울리는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다. 의학계가 분명히 '장애'의 일종이라 판단한 '서번트 증후군 환자' 역시 그런 부류다.
영화 '다슬이'는 서번트 증후군(발달장애가 있는 이들이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현상)을 보이는 자폐아의 이야기다. 고즈넉한 바닷가 풍경. 뭉툭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커다란 눈매의 여자아이가 있다. 울진의 작은 어촌에서 할머니, 삼촌과 함께 살고 있는 아홉 살 소녀. 낮에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그림을 그리다가 동네 어른들에게 혼이 나고, 저녁에는 집에서 눈사람이 나오는 만화를 보는 것이 다슬이의 하루이다.
얼마나 눈을 좋아하는지, 하얀 우유에 만 흰 쌀밥을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하는 다슬이. 눈이 잘 오지 않는 울진에 눈이 내리는 기적이 일어난 후, 아이는 눈사람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그것을 끌고 다닌다. 그리고 크레파스로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고 온 동네에 페인트칠을 하기 시작한다.
동네 여기저기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다슬이 때문에 늙은 할머니와 동네 나이트클럽 호객꾼으로 일하는 삼촌은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녹기 시작한 눈사람을 슬퍼한 다슬이는 삼촌에게 수퍼마켓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냉장고를 사 달라 조르고, 돈이 없는 삼촌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는 수백 가지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이들 방식대로 아이를 사랑한다. 온전히 자기 세계에 갇혀 곰살맞은 곳이라곤 하나 없는 다슬이를 정성껏 보살피는 것이다.
어촌의 순한 사람들과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자폐아 소녀의 삶은 추운 겨울 바다의 투박한 파도처럼 묵묵히 펼쳐진다. 다슬이의 눈에 보이는 바다는 집채만 한 고래가 살고, 새우가 춤추고, 눈 아저씨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환상의 공간이다. 아이는 자신의 상상만으로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유일한 언어인 '그림 그리기'를 하고 있다.
아이가 울진의 해변을 낑낑대며 걸으면서 떠올리는 많은 상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오징어가 많이 나오는 바닷가 '울진'과 분명 다르다. 오징어 덕장이 이어진 곳, 잘게 썬 오징어로 밥을 먹는 이 오징어 마을에서 다슬이는 흰 우유에 밥을 말아 먹는 자기 고유의 식성을 고집한 채 오징어를 먹지 않는 거의 유일한 동네 아이일 테니까 말이다. 이토록 예외적인 아이가 눈사람을 끌고 해변을 걸을 때, 우리가 알던 풍경은 아이의 시선만큼 비켜서 있다. 그런 차이 때문에 울진의 풍경은 몹시 낯설고 생경해 보인다.
다슬이가 삼촌을 처음으로 '삼촌'이라 분명히 발음하며 부르던 때, 동네 사람들의 협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페인트통을 든 채 그토록 그리고 싶어 했던 것들이, 눈앞이 아닌 동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야 그 실체를 드러내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이의 장애가 실은 아이의 '가능성'일 수도 있음을, 아이가 '바보'가 아닌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삼촌의 눈에 그려진 경이로움 역시 평화로운 울진의 바닷가 풍경과 맞물리며 눈동자가 큰 아이의 얼굴과 정확히 포개진다.
페인트통을 든 채 마을의 담벼락에 끊임없이 줄과 선을 그려대던 다슬이. 퍼즐처럼 조각나 의미 없어 보이던 선들이 기어이 맞춰져 하나의 의미를 가질 때, 우리는 우리가 결코 볼 수 없었던 것들, 가령 한 소녀의 감추어진 꿈이라든가, 가능성을 '기어이' 보게 된다. 아홉 살 다슬이가 사는 바닷가 마을 달동네 산꼭대기에서 내가 읽은 메시지는 자신이 사는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폐의 세계에선 그들이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에 대해 '사랑'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나는 사랑을 믿고 싶어졌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와 고래와 눈사람이 존재하는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에서라면 충분히.
●다슬이: 박철순 감독 작품. 아역 배우 유해정이 아홉 살 자폐아 다슬이 역을 맡아 열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