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길 위의 인문학' 탐방단 80여명이 '충무공의 바다, 불패의 바다'를 주제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 해군의 첫 승전지였던 옥포와 제승당(制勝堂), 이락사(李落祠), 관음포, 충렬사를 답사하는 1박2일 일정을 떠났다. 이번 탐방은 국립중앙도서관과 조선일보, 교보문고 공동 주최로 진행됐다.

이순신 연구가 중에 유일하게 동양철학을 전공한 순천향대 임원빈 교수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이순신 장군은 항상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열세한 적과 맞서 싸웠다고 말했다. 당파 싸움만 일삼으면서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역사관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판옥선은 명종 10년(1555년)에 시제품이 나왔으며 선조는 임란 이전에 불차채용(不次採用)이라고 해서 직책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유능한 무인들을 천거 받았다. 그때 천거된 이들이 바로 이순신·이억기 같은 명장이다.

이순신의 사령부가 있었던 한산도까지는 통영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이동을 했다. 제승당까지 가는 길은 적송과 함께 모래밭이 훤히 비칠 정도로 맑은 물빛이 인상적이었다. 참모들과 작전 계획을 협의했던 제승당과 '한산도가(閑山島歌)'로 유명한 수루를 지나 한산정(閑山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는 145m,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뿐인데 해상 모의 전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인 노승석 순천향대 교수는 이순신 장군의 가장 위대한 점은 백의종군 기간에 모친상까지 당하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던 그의 정신에 있다고 말했다.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기 수양부터 해야 한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모습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길위의 인문학 탐방단이 1일 강사로부터 이순신 장군 사령부가 있던 한산도 제승당의 유래를 듣고 있다.

정유재란 최후의 격전지가 보이는 첨망대(瞻望臺)에 올랐다. 이순신 장군이 적의 유탄을 맞고 최후를 마친 이락파(李落波)와 노량을 잇는 해역을 굽어보자니 감회가 새롭다. 이순신 장군은 피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전쟁에서조차 '적을 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此獸若除 死卽無憾)'며 적진에 뛰어들었다. 고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살해한 이들을 벌해야 한다는 삼도수군통제사로서의 의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1년 전 아들 면을 잃은 아비로서의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었을까.

'나는 편지를 뜯기도 전에 살과 뼈가 먼저 떨리고 정신이 없었다. 겉봉을 대충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맨 위에 '통곡'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들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목놓아 울었다. 하늘이 어찌 이리 잔인한가'(정유일기·1597년 10월 14일) 셋째 아들 면의 죽음 앞에서 이순신 장군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네 몸에 화가 미친 것이냐?' 하고 오히려 자신을 책망했다. 이 순간만큼은 '성웅'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탐방단 일행으로 참여했던 서병선(45)씨는 "카리스마와 애국심이라는 박제화된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보단 그분의 인간적인 고민이나 아픔을 엿볼 수 있어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와 동행한 신주환(14)군은 "리더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실력과 도덕성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의젓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