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게 실연당한 사람들과 관련된 소설을 썼다. 소설은 실연당한 사람들이 오전 일곱시에 한 공간에 모여 조찬 모임을 갖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연인과 사랑하고 남은 물건들, 즉 '실연의 기념품'을 처리하기 위해 모인다. 한낮의 눈부신 태양 속에서도 그림자는 숨겨져 있는 법. 한 시절의 연애가 끝나면 어쩔 수 없이 남게 되는 사랑의 흔적들. 이니셜이 박힌 반지와 목걸이, 길거리 가판대에서 사들인 싸구려 액세서리들, 가방, 책…. 이들은 실연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망연자실하며 어찌할 줄 모른다.
소설에는 이런 문장들을 썼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이별은 앞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실연은 언제나 뒤로 온다. 실연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을 일시에 집어삼키는 블랙홀이고, 끊임없이 자신 쪽으로 뜨거운 모래를 끌어들여 폐허로 만드는 사막의 사구다. 실연 후,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 쪽으로만 회귀했다. 강력한 자석처럼 과거가 그 모든 시간과 가능성을 빨아들였다. 기쁨과 슬픔, 회한과 외로움, 쓸쓸함, 고독은 실연이라는 화산재에 뒤덮였다. 미래 역시 과거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치도 나아가지 않은 너무나 익숙한 미래. 실연은 그렇게 오래된 미래가 되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산다. 말할 것도 없이 고통스러운 불면의 밤을 보내고, 술로 마음을 달래며, 모든 것이 잊히길 원하며 수면제를 삼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시간이, 세월이 약이란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만큼 시간이 흘러야만 잊히는 걸까. 사랑에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3초 만에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0년이 지나도 그 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다소 우울해 보이는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 조엘은 2년 동안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도 주황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다니는 명랑하고 화끈한 여자 클레멘타인과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격에 끌려 사귀게 되지만, 서로에게 이끌리게 했던 그 성격 때문에 싸움은 격렬해지고 점점 지쳐간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클레멘타인과 심한 말다툼을 한 후, 조엘은 그녀에게 사과하러 찾아간다. 그러나 클레멘타인은 마치 조엘을 처음 본 사람처럼 냉담하게 대한다. 우연히 상처받은 기억만 지워준다는 라쿠나사에서 그녀가 자신과 관계된 모든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조엘은 실의에 빠져 체념한 상태로 자신 역시 그녀에 관한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 라쿠나를 찾아간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랑의 기억 전부를 지워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와 좋지 않았던 기억을 지워버릴수록, 그녀와 처음 사랑에 빠졌던 느낌과 설렘은 점점 더 강해지기 시작한다. 지금은 끔찍해진 클레멘타인의 푸른색 머리카락도, 유별난 그녀의 주황색 재킷도 모두 그의 눈에 처음 설렘을 주었던 기억과 연결돼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다.
조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실패한 사랑의 기억들을 지운다는 발상은 감독 미셸 공드리가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보여준 SF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기억을 지우려는 라쿠나사의 직원과 기억을 지키려는 조엘의 숨가쁜 추격전이 벌어지면서, 우리는 조엘이 기어이 사랑의 기억을 놓지 않고 그것을 지켜나가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작이 나른한 짐 캐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것이 나는 언제나 좋다. 졸린 눈으로 출근 지하철 앞에 서 있던 그가 충동적으로 맨해튼으로 가는 기차 대신 '몬타크'행 기차를 타는 장면 역시 가슴 설렌다. 뉴욕시 끝에 붙어 있는 몬타크는 기차를 타고 세 시간쯤 가면 나오는 바닷가다. 한국으로 치면 정동진쯤이 될까. 2월의 겨울 바다가 보여주는 온갖 스산함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그곳에서 그는 스케치북에 풍경을 그린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이제 여자를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중얼거리면서. 이곳, '몬타크'가 클레멘타인과 사랑에 빠진 바로 그 장소라는 것도 망각한 채로.
언젠가 나도 회사로 가는 지하철을 타는 대신 어디론가 불쑥 떠난 적이 있었다. 그곳이 강릉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는지, 조엘이 바라보던 '몬타크'의 바다는 그 시절 내가 앓던 황량한 내면 풍경의 일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추운 겨울 바다를 걷는 연인들의 풍경에선 낭만보단 기이한 스산함이 몰려왔다. 그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그때, 내 뺨을 스치는 칼날 같은 바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지운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를 만나 또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가 말하는 건 명확하다. 아무리 기억을 지운다 해도, 사랑의 흔적은 몸 안에 남는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말 것이란 것.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사랑의 동어반복이 지속되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기억보다 우위에 있다. 살면서 일어나는 그토록 마술적인 순간은 인간의 뇌 속에서 편집되거나 왜곡되는 기억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겐 이 세상 모든 소설이 연애소설이거나, 이 세상 모든 노래가 결국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로 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라는 니체의 아포리즘은 힘을 잃는다. 사랑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오답을 쓰고, 그 오답을 고쳐나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 이터널 선샤인: 찰리 카우프만 각본, 미셸 공드리 감독 작품. 짐 캐리가 '조엘' 역을 '케이트 윈즐릿'이 클레멘타인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