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동안 국제 파생금융상품 허브(중심지)가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온 싱가포르가 이제는 아시아 원자재 거래 허브 자리를 놓고 상하이·홍콩 등과 경합을 벌이고 있다. 세제혜택과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규제로 트레이딩 인력 모으기에 나선 것이다.

2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싱가포르의 원자재 트레이딩(중개업) 인력에 대한 각종 우대조치 덕분에 전 세계 트레이딩 인력이 앞다퉈 싱가포르로 옮겨가고 있다고 전했다. FT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원자재 부문 종사자는 지난해 한 해 동안 17% 증가해 1만2000명, 글로벌 상품거래 기업들이 싱가포르에서 중개한 거래금액은 1조 달러에 달한다. 원자재 트레이더는 싱가포르 중심 상업지구로 잇따라 이주하고 있다. 원자재 '클러스터'가 탄생한 것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 3위의 원유 중개업체인 트라피규라(Trafigura)는 최근 싱가포르 법인인 트라피규라 Pte를 트레이딩 부문 상위기관으로 지정했고, 피에르 로리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아·태지역 관리 책임까지 맡아 연내에 싱가포르로 옮겨갈 예정이다. 그 외에 BHB 빌리턴, 앵글로 아메리칸 등 원자재 중개·천연자원 중개 회사들은 주력 법인을 싱가포르로 옮기고 있으며, 올램, 노블그룹, 월마 등 농산물 중개업체는 이미 싱가포르 증시에 상장했다. FT는 산업 전문가의 분석을 인용해 싱가포르에서 거래되는 원유 규모가 전 세계 거래의 15%를 차지해 제네바, 런던, 뉴욕·휴스턴에 이어 4위를 차지하고, 농산물 거래 규모는 전 세계 20%로 제네바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성과는 2001년 6월부터 싱가포르 정부가 추진해 온 '글로벌 트레이더 프로그램(GTP)'의 효과 덕분이라고 FT는 분석했다. 이 프로그램은 싱가포르에 이주해 온 트레이더에 각종 세제 혜택을 주는 계획이다. 싱가포르로 이주한 중개업체들에는 10%의 법인세율을 적용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트레이더 고용률을 갖추고 싱가포르의 은행과 금융서비스 등을 일정 수준 이상 이용하는 것을 증명하면 법인세율을 5%까지 내릴 수 있다. 트레이딩 인력이 싱가포르로 이주해 오는 것 자체도 다른 트레이딩 인력을 끌어모으는 요인이다. 정보와 네트워크가 중요한 만큼 정보가 몰린 곳으로 유능한 트레이더들이 이주해 온다는 설명이다.

그뿐만 아니라 싱가포르가 금융, 보험, 중재 시스템과 풍부한 인력 등을 갖춘 것도 매력으로 꼽힌다. 두바이 등 세금을 전혀 부과하지 않는 나라보다 친기업적 환경 기반이 잘 갖춰진 덕분에 경쟁력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동안 원자재 거래의 허브로 꼽혀 온 스위스의 경우, 최근 스위스 프랑화의 강세로 유지 비용이 늘면서 싱가포르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고 FT는 덧붙였다.

다만 싱가포르의 자유방임적인 환경은 점차 규제가 강화되는 국제 추세에 발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FT는 경고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유럽 등지에서는 불투명한 장외파생금융상품 거래에 대한 단속의 끈을 조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 중견 트레이더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가 앞으로도 글로벌 규제를 따르지 않는다면 '와일드 이스트(wild east)'란 브랜드가 될 리스크를 져야 한다"며 "향후 싱가포르 역시 국제 규준에 협조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