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다들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2010년 3월 충북 청주 동주초등학교에 부임한 김미자(42) 교사가 4~6학년을 대상으로 일진 실태를 조사했을 때였다.
대다수 동료 교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등학교에 무슨 '일진'이 있다고 그런 조사를 해요?" "우리 학교는 환경도 좋고 '사건'도 없잖아요?"
동주초등학교는 사방이 아파트 단지다. 주위에 컴컴한 판자촌도, 시끄러운 유흥가도 없다. 김 교사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 학교폭력은 어디나 있다"고 설득했다.
조사 결과에 모두 놀랐다. 세 명 중 한 명이 "우리 학교에 '일진' 이 있다(35%)"고 했다. 보이지 않았던 피해 사례가 줄줄이 드러났다. "일진이 나를 때렸어요." "일진이 아이들을 꾀서 야동을 봤어요." "저는 돈도 뺏겼어요."
6학년의 86%, 4학년의 50%가 한 학생을 일진으로 지목했다. 청주 시내 '일진 연합' 소속 중학생들까지 끼어들어 이른바 '빽전'(하급생 일진 간의 서열을 가르기 위해 상급생 일진들이 대신 싸우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교사들은 입을 딱 벌렸다. "개구쟁이들로만 알았는데…."
김 교사는 교직 경력 20년째다. 중3과 초등학교 3학년 두 딸이 있다. 2009년 문재현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장(일진 문제 전문가)의 영향으로 학생폭력에 관심을 갖게 됐다. 동주초등학교에 부임하기 직전, 전에 근무한 학교 아이들과 서로에게 못한 얘기를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키 작은 영수(가명)가 "선생님에게 섭섭했다"고 했다. 운동부의 덩치 큰 철수(가명)가 툭하면 영수를 때렸다. 계속 꾹 참다가 하루는 순간적으로 '울컥' 해 철수의 멱살을 잡았다. 영수는 "그때 선생님이 보고 '둘 다 잘못했다'고 했는데, 그건 공평하지 않다"고 했다. 서열 높은 철수는 마음대로 영수를 때려도 서열 낮은 영수가 똑같이 하면 큰일이 난다. 그들 세계엔 이런 구조가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내내 괴롭힌 철수와 참다못해 대든 영수를 똑같이 취급하니 억울했다는 얘기였다. 김 교사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올해 2월부터 동주초등학교는 교장·교사가 모두 마음을 열었다. 한 학부모가 "우리 아이 카카오톡에 일진이 '내 생일이니 1000원씩 상납하라'는 메시지가 떴다"고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동주초등학교는 교장과 교사들이 뜻을 모아 경위를 조사하고,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 부모를 모두 모아 토론을 벌였다. '밤 10시 이후 휴대전화 사용하지 않기' '컴퓨터를 거실로 옮겨 밤늦게 인터넷 메신저 못하게 하기' 등 공동의 규칙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주말에도 전화를 걸어 "여기 5단지 놀이터인데 노는 형·누나들이 모여 있다", "○○이 ○○을 때리려 한다"고 실시간으로 신고할 정도가 됐다. 일진이었던 아이가 스스로 김 교사를 찾아와 "이제 일진 안 하겠다"며 일진 탈퇴 선언을 하기도 했다. 김 교사는 "교장·교사·부모가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학교폭력은 해결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