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TV를 통해 방송을 시청하는 박모(55)씨는 지난달부터 평소 즐겨보던 방송 프로그램을 사실상 시청하지 못하고 있다.
박씨가 TV를 볼 때마다 갑자기 '보고 계신 아날로그 TV는 앞으로 정상적인 시청이 어려우니 선명한 화질로 자막 없이 시청하려면 바로 정부 지원을 신청하세요'라는 장문의 자막이 화면을 덮는 것. 짙푸른 배경에 하얀 글씨로 쓰인 자막은 전체 화면의 절반을 덮었다.
박씨는 "한 번 자막이 나오면 10분이 넘게 이어지고, 하루에도 수차례 이런 자막 송출이 반복돼 방송 시청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박씨의 TV에 송출되는 자막은 아날로그 방송 중단을 알리는 안내 자막이다. 아날로그 방송은 오는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종료될 예정이다. 안내 자막은 안테나로 아날로그 방송을 직접 수신하는 전국 49만여 가구에 송출된다.
아날로그 TV를 가지고 있더라도 유료방송에 가입했거나, 아파트 공시청 안테나 등을 통해 디지털TV를 시청할 시스템을 갖췄다면 자막이 송출되지 않는다. 전체 가구의 3%에 달하는 이 가구들은 정부 지원을 받아 디지털 컨버터를 대여하거나, 디지털TV를 구매하는 등 디지털 전환 준비를 해야 방송을 계속 시청할 수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아날로그 방송 종료가 8개월여 앞으로 다가오자 빠른 전환을 위해 안내 자막을 내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방통위는 6월까지는 전체 화면의 50% 이내에서, 7월부터는 50% 이상으로 안내 자막의 크기도 키울 계획이다. 또 7월 이후 디지털방송 수신기기 보급률이 98% 이상이 되는 지역은 시범적으로 아날로그 방송을 끊는 '가상종료'를 실시할 계획이다.
하지만 안내 자막이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자막 고지 방송이 나가기 시작한 이후, 방통위와 청와대에는 수백건의 민원이 쇄도했다.
아날로그 TV를 시청하고 있는 이모(37)씨는 "하루에 90분 가까이 송출되는 고지는 안내 자막이 아니라 자막 테러"라며 "12월까지는 국민의 시청권이 보장되는데, 빨리 바꾸라며 국민의 시청권을 가로막는 대형 자막을 내보내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김모(30)씨는 "아날로그 방송을 중지되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거의 없고, 큰 글씨로 자막을 내보내지 않아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데, 시청을 방해하면서까지 자막을 내보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자막 자제를 요청했다.
방송통신위는 자막 고지 방송은 불가피하다는 반응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여전히 연말에 아날로그 방송이 종료된다는 것을 명확히 모르거나, 자신이 해당하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 "미리 전환하지 않고 미루다 연말에 정부 지원 신청자가 한꺼번에 몰릴 경우 지원 처리가 늦어져 상당 기간 방송을 시청하지 못하는 가구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윤석민 교수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아날로그 전환을 독려하는 자막을 내보내는 것은 방송 시청을 훼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빨리 정부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현재 안내고지 방송이 나오는 세대는 모두 정부 지원을 받아 2만원을 내면 컨버터를 대여할 수 있다. 이후에 디지털 TV를 구매하고 내년 3월까지 컨버터를 반납하면 2만원은 환급된다. 저소득층이나 장애인 가정의 경우 디지털TV 구매 비용 일부를 지원받을 수도 있다. 지원대상 및 지원규모 확인은 디지털 전환 지원센터 콜센터(국번없이 124)로 전화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