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위조사건
래니 샐리스베리·엘리 수조 지음|이근애 옮김|소담출판사|416쪽|1만5000원
1991년 11월의 어느 날 아침, 프랑스 파리의 자코메티협회장 메리 리사 파머는 경매 카탈로그를 넘기다 그림 한 점에 주목한다. 자코메티의 1954년작 '서 있는 누드'. 어색한 구성의 그림을 마주한 파머의 육감이 속삭였다. '이 그림, 가짜야.'파머는 즉시 런던 소더비로 날아가 실물을 살펴봤다. '가짜가 확실해.' 파머는 소더비 측에 "위작이 의심된다"고 했지만 소더비는 테이트갤러리 기록보관실에 소장된 하노버갤러리 판매작품 목록에 그 작품이 있다며, 진작임을 확신했다. 하노버 갤러리는 오랜 세월 자코메티와 거래했던 곳. 결국 파머는 몸소 테이트갤러리 기록보관실을 방문, 하노버 갤러리 판매작품 목록을 열람한다. 소더비의 주장대로 문제의 그 작품은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작품 사진은 최근에 찍은 것이고, 판매 내역의 잉크도 새것이었다. 누군가 문서를 조작한 것이다.
미술품의 진위(眞僞)를 판별할 때 작품 못지않게 중시되는 것이 소장 내력(provenance)이다. 사람 눈에만 의존해 작품을 평가하는 것보다 작품에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소장 내력이 딸려오고 명성 있는 갤러리나 기록보관실이 이 자료들을 뒷받침할 때, 구매자들은 작품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다. 일종의 '그림 족보' '책임 보험' 같은 것.
기자 출신의 부부 작가가 쓴 이 책은 1990년대 영국을 떠들썩하게 한 희대의 미술품 위조 사건을 다뤘다. 사건을 주도한 인물 존 드류는 화가 존 마이어트를 꼬드겨 자코메티, 브라크, 샤갈 등의 위작 240여점을 제작해 팔아넘겼다. 드류는 작품 소장내력까지 위조했다. 그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ICA(현대미술학회)와 테이트 갤러리 기록보관실을 드나들며, 주요 갤러리의 거래 목록에 위작을 끼워넣었다. 기록보관실에서 빼돌린 자료를 짜깁기해 유명 소장자들의 가짜 편지를 만들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가 판매한 위작은 소더비와 크리스티에서 비싼 값에 팔려나갔고, 그는 큰 부자가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내면보다 겉포장을 중시하는 미술계의 생리, 기부금 모으기에 급급한 미술관 직원들이 한몫했다. 화려한 언변과 박식함, 고급스러운 외양으로 무장한 존 드류는 자신을 핵물리학자이자 대학교수라고 소개하며 미술계 인사들에게 관계를 맺었다. ICA와 테이트에 거액을 기부, 기록보관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드류의 실체는 그가 판매한 위작과 다를 바 없었다. 이름, 학력, 직업, 가족관계…. 그가 사람들에게 내세운 모든 이력이 가짜였다. '고졸(高卒)의 공상허언증 환자'. 파머의 끈질긴 의문 제기, 런던경시청 문화재전담반의 활약 등으로 1997년 마침내 드류가 법정에 서자 세상이 그에 대해 내린 평가다.
사건에 대한 풍부한 취재와 탄탄한 구성 덕에 일사천리로 읽히는 책이다. 금전적 이익보다는 타인의 존경과 관심을 갈구하며 희대의 사기극을 저지른 드류의 이야기는 몇 년 전 우리 미술계에서 일어났던 비슷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드류의 사기행각과 함께 흥미롭게 읽히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바로 드류의 의뢰로 위작을 그린 화가 마이어트의 인생에 일어난 반전 드라마다. 가난 때문에 위작을 제작했으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경찰에 순순히 자백한 마이어트는 1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범수로 4개월만 복역하고 풀려난다. 출감 이후 그에게는 세계 곳곳에서 그림 주문이 쏟아졌다. 그는 2002년 대가들의 작품 모사본을 판매하는 사업체를 설립했고, 각종 TV 프로그램에 강연자 및 패널로 참여하며 유명세를 탔다. 2004년엔 화가 지망생들에게 거장의 화풍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는 방송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 그림 못지않게 그에 얽힌 '이야기'를 좋아하는 미술계가 이렇게 또 하나의 스타를 만들어낸 셈이다. 원제는 'Proven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