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웨이가 나온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뒤늦게 영화 '만추'를 본 후, 세 번 정도 놀랐다. 한 번은 탕웨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주는 스산함 때문이었고, 또 한 번은 비 내리는 시애틀의 풍경이 막 감옥에서 나온 그녀의 어두운 내면과 기묘할 정도로 맞닿아 있단 생각 때문이었고, 마지막은 바람 냄새가 나는 그녀의 물기 많은 저음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이토록 매혹적인 배우를 본 건 참 오랜만이었다. 중국식 억양이 묻어 있는 대사만 녹음해 온종일 듣고 싶을 만큼.
남편을 살해한 죄로 복역 중이던 중국계 미국인 여성 '애나'가 7년 만에 휴가를 나온다. 이틀 안에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하는 애나. 그녀가 가야 하는 곳은 비와 안개와 커피의 도시로 알려진 미국 시애틀. 휴가는 애나가 원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과 유산 문제 때문에 가족이 요청한 것이었다.
시애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애나는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훈'을 만난다. '훈' 또한 누군가를 피해 멀리 달아나고 있다. 버스비로 30달러를 꾼 훈이 그녀에게 돈 대신 시계를 주었기 때문에 애나는 그의 시계를 찬다. 훈의 시계가 애나의 손목에 걸쳐진 순간, 감옥에 있는 동안 멈춰 서 있던 그녀의 시계가 현실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함께 길을 걷는다.
이때, 안개와 비의 도시인 시애틀은 의미심장한 도시로 변신한다. 우선 끊임없이 내리는 비는 애나의 일그러진 과거와 어두운 내면 풍경을 보여준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길과 숲은 애나와 훈의 알 수 없는 미래처럼 아련하다. 애나는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훈은 애나를 오리 소리를 내는 시애틀 관광버스에 태우고, 놀이공원에 데려간다. 시애틀이 애나의 고향인지 알 리 없는 훈은 관광가이드처럼 그녀를 놀이공원의 범퍼카에 태운다.
그들이 폐관 직전의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보게 되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통해, 훈은 비로소 애나의 속마음을 엿보게 된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왜 그렇게 변한 건가요?"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던 과거, 누군가를 죽이는 짐승의 시간을 견디던 그녀가 비로소 조금씩 움직인다.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열며 소통하는 과정 속에 시애틀의 풍경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안개, 비, 그리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의 온기로 말이다.
시애틀은 커피의 도시다. 알려져 있다시피 시애틀의 'Pike place market'에는 스타벅스 1호점이 있다. 거리에는 카페가 즐비하다. '시애틀 베스트커피', '툴리스 커피', '피츠커피' 같은 알려진 프랜차이즈와 바리스타마다 다른 맛을 내는 작고 특징 있는 카페가 있다. 언젠가 이곳에 사는 한 친구가 '빅토롤라'나 '비바체' 같은 로컬 카페에서 파는 커피 맛을 설명해 준 적이 있었는데 비가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비가 자주 오는 지역 특성상 이곳 사람들은 따뜻한 커피 마시는 일이 일상화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 2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돌아온 애나가 훈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버스 휴게소의 카페 안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시애틀에서라면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느껴진다.
봄이 봄처럼 느껴지지 않는 어떤 날, 영화 '만추'를 보는 일은 꽤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 아마도 실연당했거나, 누군가를 사랑해서 괴로운 사람이라면, 애나의 뒷모습이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만추'가 사람의 뒷모습을 다루는 영화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추'는 탕웨이에 의한, 탕웨이의 영화다. 영화 개봉 당시 드라마 '시크릿 가든'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현빈이었지만, 영화의 마지막을 보고 나면 이 영화가 온전히 탕웨이 한 사람에게 맞춰진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이미지에 강렬히 남아 있던 '색, 계'의 느낌은 완벽히 사라진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건 단 하루면 족하다. 훈과 애나처럼.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알 수 있는 몇 가지 진실 중 한 가지를 탕웨이의 눈빛이 말해준다. 그리고 시애틀의 비와 안개, 커피가.
만추: '여고괴담''가족의 탄생'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의 장편.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현빈과 탕웨이가 훈과 애나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