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불교의 거목 성철(性徹·1912~1993) 스님. 오는 11일은 불교 안팎에서 존경을 받았던 그의 탄신 100주년이다. 20만 추모 인파가 해인사에 모여 스님을 떠나보낸 지도 벌써 19년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가 성철을 좇고 있다. 스님이 주석했던 해인사 백련암과 전국의 문도 사찰에는 철마다 1000여명이 3박4일간 그가 일러준 '아비라 기도'를 드린다. 성철 스님의 1967년 동안거 법문 내용을 담은 '백일법문' 공부 열기도 식지 않고 있다. 시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눈을 밝히고, 삶을 변화시키는 성철의 힘이다.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

바깥바람은 차가웠지만 5층 법당 안은 뜨거웠다. 4일 오후 부산 중앙동 도심 사찰 고심정사(주지 원택 스님) 불교대학. 회색 법복을 입은 60여명의 불자가 장궤합장(바닥에 무릎을 대고 몸을 L자로 세우고 합장한 모양) 자세로 '옴 아비라훔캄 스바하'를 염송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튀는 사람 없이 하나로 뭉쳐진 진언 소리가 합창곡처럼 법당 안을 울렸다. 성철 스님이 생전에 직접 가르친 '아비라 기도'다.

1번에 1시간쯤 걸리는 아비라 기도에서 진언 염송에 걸리는 시간은 30분 정도다. 시간이 갈수록 초심자들의 법복은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젖고 몸도 덜덜 떨린다. 왜 이런 기도를 하는 걸까. 생전의 성철 스님을 친견했던 김달말(여·75) 씨는 "큰스님은 기도는 일체중생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늘 강조하셨다"고 했다. "보통 사람도 알아듣기 쉽게 '백화점 사장할래, 구멍가게 할래?'하고 물으셨죠. 일체중생을 위해 기도하면 그 복락(福樂)이 다 인연법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온다. 남편 아들 위해 백날 기도해 봐야 구멍가게 장사밖에 안 된다고요." 내가 아닌 남을 위한 기도가 결국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린다는 가르침이다.

"해주세요" 대신 "하겠습니다"

아비라 기도는 여러 면에서 기존 불교의 한계를 극복한 기도법이다. 입적 전까지 20년간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원택 스님은 "기도와 참회는 스스로 하라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었다"고 했다. 이런 뜻에 따라 기도는 신도들 스스로 조직하고 실행한다. 기도를 이끄는 일도 스님이 아니라 신도 중에 뽑힌 입승(立繩·사찰 기강 확립 소임)이 맡는다. 108배를 하면 머리와 엉덩이가 부딪히고, 진언 염송을 하다 쓰러지면 옆 사람에게 기대야 할 만큼 밀착해서 앉는다. 이런 어려운 고비마다 서로를 북돋아주는 것도 스님이 아니라 신도들 스스로다. 5년 전 불자가 된 뒤 아비라 기도를 시작한 김의중(55)씨는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비는 게 아니라 '…하겠습니다'라고 스스로를 바꾸는 결심을 굳혀가는 과정인 것도 아비라 기도의 특징"이라고 했다. 원택 스님이 웃으며 한마디 보탰다. "스님이 축원도 안 해주지, 불사(佛事)할 때 기와에 이름도 못 쓰게 하지, 기도와 수행은 힘들고 엄격하지…. 그러니 우리 문도들이 맡은 사찰은 신도가 잘 안 늘어요. 허허허."

"절 담을 넘어 사회를 밝힌 가르침"

성철 스승이 입적한 뒤 오래된 녹음테이프의 거센 경상도 사투리를 표준어로 옮겨 적어 '백일법문' 책으로 펴낸 이도 원택 스님이다. 조계종 불교인재원(이사장 엄상호)이 2007년 이후 매년 한 차례 진행 중인 '백일법문 강좌'도 이번에 5기를 개강했다. 지난 5일 저녁 서울 견지동 전법회관의 작은 강의실은 40여명의 수강생으로 꽉 찼다. 이전 강좌 졸업생들은 4기 졸업생인 엄 이사장의 주도로 지난달 말 별도 모임도 가졌다. 선(禪) 수행법, 삼매(三昧), 윤회와 성불(成佛) 같은 주제의 이야기가 오갔다. 모임 중간 한 중년 남성이 "불교를 잘 모르는 친구가 '산은 산 물은 물'(종정 수락 법어)의 뜻을 묻는데 대답하기 참 곤란했다"는 말을 꺼냈다. "공(空)과 중도(中道) 같은 불교 개념으로 설명하면 이해를 못 할 테고, 그렇다고 '말 그대로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뜻'이라고 하면 큰스님이 별걸 다 폼 잡고 말한다고 웃지 않겠어요?" 불교인재원 김응철 원장(중앙승가대 교수)은 "성철 스님의 그 말씀은 오랫동안 신앙과 의례 중심으로 고착됐던 불교뿐 아니라 상식이 통하지 않았던 사회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불교를 넘어 사회 전반에 궁금증과 논쟁, 공부하려는 의욕이 일어났지요. 부처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남이 없다면 사실 어떤 답도 가능할 겁니다. 성철 스님은 중생을 위한 이타심으로 그 낚싯바늘을 던졌고, 낚싯바늘에 걸린 고기가 바늘에 끌려 다니듯 우리는 지금도 거기에 끌려 다니면서 답을 찾고 공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백일법문 강좌 졸업생들은 앞으로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그동안의 공부를 나누고, 서로의 질문에 답하는 자리를 가질 계획이다.

☞ 아비라 기도

성철 스님이 당대(唐代)의 총림(叢林) 수행법을 응용해 만든 기도법. 1967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처음 시작됐다. 108배 예불 참회, 장궤합장 비로자나법신진언 염송, 능엄주 독송 등의 한 묶음 한 시간을 1회로 친다. 통상 3박4일간 24회를 드린다. 진언 ‘옴 아비라훔캄 스바하’는 성철 스님이 산스크리트어(범어)에서 직접 음역했다. ‘옴’은 범음(梵音)의 으뜸 글자, ‘아비라훔캄’은 비로자나불(佛)의 청정(淸淨) 법신(法身), ‘스바하’는 ‘원만한 성취’의 뜻으로 진언의 마지막에 붙이는 범음이다. 생전의 성철 스님은 “아비라 기도의 참뜻은 진언의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염송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 백일법문

성철 스님이 1967년 해인총림의 방장이 된 뒤 첫 동안거(冬安居)를 맞아 해인사에서 설한 법문. 상권에서 불교의 본질과 인도의 원시불교 및 중도(中道)·중관(中觀)·유식(唯識) 등을, 하권에서 천태종과 화엄종 및 선종 사상, 조사어록, 돈오돈수·돈오점수론을 다루는 등 불교 2500년 사상사를 중도 사상으로 꿰뚫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