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2시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미니버스를 타고 온 한 무리 일본인 관광객이 탑골공원 옆, 인사동길 남인사마당관광안내소 앞에 우르르 내렸다. 관광객들이 인사동길을 따라 열 걸음을 떼자 큰길 왼편에 화장품 가게 A사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갸쿠상, 오갸쿠상, 이랏샤이마세(손님, 손님, 어서 오세요)." 관광객들을 바라보던 화장품 가게 점원이 큰 소리로 호객행위에 나섰다. 무리의 절반은 한류 스타 모습을 본뜬 대형 광고물이 세워진 화장품 가게로 들어갔다.

27일 오후 서울 인사동 문화지구. 최근 외국산 저가 기념품과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화장품 가게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 서울시와 종로구가 이를 규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또다시 열 걸음을 떼자 이번에는 전통 공예품을 취급하는 노점(露店)이 눈에 들어왔다. "잇 이스 오케이(It is OK). 굿 프라이스(Good price)." 노점 주인이 물건을 들어 보이자 관광객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2명이 그 자리에서 5000원을 주고 주걱 모양 목공품을 샀다. 기뻐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주인은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인 코리아"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주걱 어디에도 '한국산'이라는 표시는 없었다.

인사·낙원·관훈 3개 동(洞)에 달하는 인사동 거리 17만5783㎡를 찾은 하루 관광객은 10만명. 인사동 문화지구는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전통문화 향기가 물씬 풍기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거리마다 빽빽이 들어섰던 전통 공예 상점은 하나, 둘 골목 안쪽으로 밀려났고 그 자리엔 화장품 가게가 들어섰다. 10년 가까이 인사동 문화지구에서 장사했다는 한 찻집 사장은 "문화지구 지정 이후 땅값과 권리금이 2배 가까이 오르고, 화장품 가게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공예점이 하나·둘 짐을 쌌다"고 했다.

일부는 문화지구의 주(主) 도로인 인사동길에서 멀리 떨어진 골목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고, 아예 장사를 그만둔 사람도 생겼다.

겉보기엔 분명히 전통 물품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산(産)인 물건도 늘어났다. 고가의 공인(公認) 전통품을 취급하는 한국관광명품점 송안자 매니저는 "(인사동 문화지구 물건은) 5년 전만 해도 손색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서 "공예품점에서 파는 물건 전체의 50~60%는 중국산으로 보면 된다"고 했다. 상인들 사이에서는 "관광객들이 어차피 구분도 못하는데, 중국산이면 어떠냐"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서울시가 칼을 빼들었다. 시는 인사동 문화지구 내에서 외국산 제품 판매를 금지하는 '서울특별시 문화지구 관리 및 육성에 관한 조례'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인사동은 지난 2002년 4월 문화예술진흥법과 시 조례에 근거해 국내 최초 문화지구로 지정됐다. 문화예술진흥법에는 "문화지구 지정 목적을 해칠 우려가 있는 영업 또는 시설을 시·도지사가 금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시는 이 조항을 근거로 조례 안에 외국산 저급 문화상품 판매를 금지하는 내용의 조항을 신설할 계획이다.

또 최근 급격히 늘어나 전통문화 상점의 존립을 위협한 화장품 매장은 인사동 문화지구 내 금지 업종 목록에 추가된다. 지난 4년 동안 문화지구 내에 화장품 매장 11곳이 문을 열었다. 시는 화장품 매장 외에도 입주 문의가 빗발치는 이동통신사대리점과 학원 등 신종 상업시설도 입주 금지 업종 목록에 추가하기로 했다. 현재 비디오물감상실업, 게임제공업, 관광숙박업 등 25개 항목이 인사동 내 금지 영업 및 시설로 규정돼 있다.

하지만 이번 조치가 인사동 거리를 예전처럼 되돌릴 수 있을지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20년 넘게 인사동에서 공예품점을 운영했다는 한 여주인은 "화장품 가게야 안 들어오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중국산 물건은 규제하기가 애매하지 않으냐"며 "중국산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싼 베트남산도 들여 온다는데, 막을 수 있겠나"라고 했다.

종로구는 지난 24일 인사동 문화지구에서 전통물품 등을 판매하는 업소에 대한 융자 지원 신청을 검토하다 '중국산'을 팔고도 버젓이 융자 신청을 낸 업소를 적발했다. '우리나라 전통상품을 팔아야 한다''전통문화 수호를 위해 앞장선다'는 등 내용이 담긴 각서까지 받고 신청을 받지만, 중국산 상품을 팔면서 구(區)에 신청서를 낸 것이다. 종로구 문화공보과 정요섭 문화예술팀장은 "중국산 물건을 파는 몇몇 업주들이 융자 조건을 알면서도 신청한다"면서 "이들 중에는 수십년 동안 인사동에서 장사 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