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단독 개업을 준비 중인 4년차 변호사 L씨는 변호사 업무와 별도로 공인중개업을 겸업(兼業)할 계획을 세웠다. 다른 공인중개사와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부동산 중개와 소송까지 맡아서 하는 이른바 '부동산 전문 법률사무소'를 설립하는 것이다. L씨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주로 부동산 소송을 맡아 했고,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달 초,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변협)에 공인중개사와 동업을 하는 부동산 전문 법률사무소가 변호사법상 허용될 수 있는지 문의를 했다.

변협은 지난 13일 공인중개사 업무 수행과 관련된 별도의 사무실을 개설하더라도 변호사법상 '이중사무소 개설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답변했다. 변호사가 변리사·법무사·세무사 등의 자격 소유자와 동업을 해 새로운 업무영역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가 변협에 공인중개사 업무를 함께할 수 있는지 문의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법률소송만 하는 시대는 갔다

변호사 업계의 경쟁이 심화되며 시험 준비에만 수년이 걸릴 만큼 어렵다는 사법시험을 통과하고도 공인중개사가 담당하는 부동산 거래 영역으로 진출하려는 변호사가 등장하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는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출신 변호사가 매년 1000명씩 배출되는 데다 법률시장 개방까지 본격화될 전망이다. 변협은 현재 1만1000여명 정도인 변호사 수가 2020년에는 2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했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계속되는 경제불황으로 변호사의 수임 건수가 급감하고 있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가진 변호사들이 부동산 중개 분야 등으로 전문성을 갖춰 시장을 개척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변호사들이 부동산중개업 분야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변호사들 중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 L씨는 "실제로 공인중개사 시험 과목 상당수가 법률에 관한 것이라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공인중개사를 취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L씨도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공인중개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는 "중개 업무만 담당하는 공인중개사와 달리 전문적인 법률지식을 갖춘 변호사가 부동산 거래 전반을 관리하게 되면 중개 사고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국적인 규모의 부동산 전문 법률회사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변호사도 있다. 부동산 중개업자들을 가맹점식으로 가입시켜 이들의 거래 계약서를 검토해 주는 등 포괄적인 법률서비스를 하겠다는 것이다. 7년차 변호사인 S씨는 "외국에서는 큰 빌딩의 매매계약서가 책 한 권 분량이 넘을 정도로 복잡한데, 한국에서는 수억원이 넘는 부동산 계약도 공인중개사들을 통해서만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는 부동산 거래가 잘못돼 소송 등으로 비화하면 그제야 변호사가 사건을 처리하는 식으로 돼 있지만, (부동산 전문 법률회사가 자리잡으면) 계약서 작성부터 계약 이행과정까지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중개와 관련된 분야의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변호사의 꾸준히 늘고 있다. 부동산 투자 및 중개 교육 프로그램인 'LBA 부동산법률중개사' 과정엔 지금까지 20여명의 변호사가 몰렸다. 경기도 수원에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A 변호사도 이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현재까지는 변호사들이 부동산 관련 법률소송만을 다뤘고 중개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러스트= 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서비스 질 향상" 對 "골목상권 뺏어"

부동산 중개업 분야로 진출을 준비하는 변호사들은 변호사 진출이 부동산 거래에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현재 부동산 거래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가서 계약을 맺고, 여기서 파생하는 법률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동업체가 생기면 의뢰인이 한곳에서 모든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일괄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것.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경쟁력을 갖춘 부동산 법무법인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대부분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영세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지만, 경쟁력 있고 전문성을 갖춘 부동산 법무법인이 등장한다면 외국 업체들에 시장을 잠식당할 위험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변호사의 부동산 중개업 진출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변협의 관계자는 "과거엔 변호사들이 최상위 전문직이라는 자부심이 강해 공인중개사 영역 진출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경쟁이 심화되고 위기감이 커지며 특히 젊은 변호사들은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지난해 "청년 변호사들을 대변하겠다"며 서울지방변호사회장 선거에 출마했던 나승철(35) 변호사는 "부동산 거래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가 공인중개사와 함께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변호사와 공인중개사뿐 아니라 변호사 변리사, 변호사 회계사 등 다양한 조합을 통해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을 키울 수 있도록 변호사법의 '동업금지 조항'을 손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법무부도 변호사가 공인중개사 등 다른 직역 전문가와 동업을 하는 'MDP(Multi Disciplinary Practice)'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MDP에 대해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변호사의 직역 확대 노력에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공인중개사 영역으로 진입하려는 변호사 대부분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갖추고 있는 상황이지만, 역시나 포화상태에 있는 공인중개사 영역에 경쟁자가 들어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는 것. 익명을 요구한 한 공인중개사는 "공인중개사 수도 크게 늘어 이미 포화상태"라며 "대형마트가 골목상권을 잠식하듯이 변호사가 영세한 공인중개사 영역을 넘보는 것은 지나친 것 아니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