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인파는 한강의 빙상을 자못 화려하고 또 쾌활하게 꿈이고, 먼지 업는 그곳에 모혀든 근백(近百)의 '스켓맨'들의 회수(回數)를 거듭하야 다름질하는 웅자는, 헤아려 만을 넘는 남녀관중의 박수를 이르키어 어름에 뿌리박은 철교까지 흔드는 듯하얏다."(1925년 1월 7일자)

1925년 1월 5일, 한강 인도교 아래 마련된 특설 링크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 빙상경기대회' 모습이다. 물론 이전에도 한강이나 압록강, 대동강 등지에서 빙상대회를 열었지만, 일본인들의 잔치였고 조선인들은 대개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러다 조선 선수가 늘어나면서 1923년부터 조선, 동아일보에 처음으로 스케이트 대회 소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25년 한강 인도교 아래서 열린 조선체육회 주최 제1회 조선빙상대회 전경과 경기 모습.(1925년 1월 6일자)

급기야 1924년 1월 13일 경복궁 경회루 연못 링크에서 열린 일인(日人) 체육단체(體協) 주최의 '제1회 조선 빙상선수권' 대회 하이라이트 5000m 종목에서, 조선 선수가 1~3등을 싹쓸이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장내 공긔는 급전직하의 형세로 한편에선 한업시 깃버하고 한편에선 눈쌀을 찌푸리게 된"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1924년 1월 14일자).

이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지자, 체협에 맞서 3·1운동 후 조선 스포츠인들이 1920년 7월 결성한 '조선체육회(體育會/대한체육회 전신)'는 이듬해 서둘러 빙상대회를 한강에서 개최한 것.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경찰 측에서 '돌연 어름의 둑게가 얄바서 위험하다'며 막았기 때문. '치위도 무릅쓰고 아츰부터 모혀든 수천명 관객의 고대와 이십여 단체의 선수의 용맹도 다만 낫을 스치는 강바람과 함께 어러갈뿐' 이다가, 오후 들어 비로소 대회를 열 수 있었다(1925년 1월 6일자). 조선, 동아일보는 각각 10원과 금일봉을 기부, 대회에 대한 큰 관심을 표명했다.

당시 기사에 등장한 경기 종목들을 보면 백, 사백, 팔백, 천오백, 오천 미돌(米突/m)과 팔백 미돌 릴레이 같은 전진(前進) 경기 외에도 '퓌겨 스켓'이나 삼백, 육백미돌 후진(後進) 같은 뒤로 달리기, 주고도(走高跳/높이뛰기) 같은 종목도 포함돼 있었다(1925년 1월7일자).

대회 이듬해엔 스케이터들이 모여 '일본인에 지지안키를 결심'한 '서울스켓팅 클럽(SCC)'을 '조선 윈터 스폿스계(界)'로는 처음으로 조직, 오늘날의 빙상연맹 같은 역할을 하면서 선수 지도와 육성에 나섰고(1926년 1월 12일), 스케이트 인구가 급격히 늘자 경전(京電)은 청계천에 야간 스케이트장을 열고(1926년 12월 17일자), 이화여전은 정구장을 얼려 '활빙장(滑氷場)'을 만드는 등(1927년 12월 15일자), 빙상 인프라도 확충됐다.

이런 노력으로 스케이트 인구는 "반도 빙상 경기계는 년년히 그 진보와 아울러… 스켓팅 열의 발흥은 실로 맹렬한 노력으로써, 소년소녀 기타 아마취어를 가하야 이것저것 할 것 업시 2,3만인을 시산"할 정도로 늘어났다(1927년 11월 18일자). 이를 토대로 1936년 동계올림픽엔 김정연·장우식·이성덕이 일본선수단 자격으로 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