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을 보고, 한 장면에서 자꾸 옛일이 겹쳐져 멈칫했다. 인사동 한 술집에서 진창 마신 주인공들, 전직 영화감독, 영화과 교수, 배우, 술집 여주인 등이 (홍상수의 많은 영화에 나오는 동일 캐릭터들) 동이 틀 때까지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눈 내린 북촌 거리로 비틀대며 쏟아져 나와 택시를 잡는 그 장면. 꼭 장 뤽 고다르의 1960년대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풍경 때문인지 대학시절 프랑스 영화를 보는 모임에 빠져 있던 때가 떠올랐다.
그날, 나는 신발을 잃어버렸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택시가 오자마자 내가 거실에 들어가듯 신발을 택시 앞에 고이 벗어놓고 택시에 타더라는 것이다. 황당해서 소릴 지르기도 전에, 택시는 새벽 푸른 안갯속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도로 위에 뜬금없이 놓여 있던 나이키 운동화를 그들 중 누군가 주워 간직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갔고, 맨발임에도 기적처럼 발에 상처 없이 집까지 기어 들어가 낮과 밤이 뒤집어진 채 종일 잠을 잤다.
그것은 어느 시장골목의 허름한 건물 3층에 세 들어 살던 한 선배의 집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군데군데 골조가 드러나 무너져 내릴 듯한 허름한 건물의 1층은 산더미처럼 닭을 튀겨 파는 집이었는데 인상적인 건 홀랑 털이 뽑힌 생닭이 박제처럼 가게 앞에 쌓여 있다는 것이었다. '치킨집'이라기보단 '닭집'이라 불려 마땅할 그런 집 말이다.
너댓 명의 사람들. 영화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들, 그렇게 영화 평론가를 꿈꾸는 사람들과 PC통신 천리안 영퀴방(영화 퀴즈)의 고수들이 좁고 허름한 건물 3층에 모여 있었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비브르 사비' 같은 프랑스 영화 몇 편을 보고, 이미 식어 전자레인지에 덥힌 치킨에 소주를 곁들이며 사람들은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러다가 한껏 날카로워지면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고, 오해라고 소리 지르고, 상대를 향해 사랑한다고, 미워한다고 버럭거렸다. 어설픈 화해와 치기가 얼기설기 이어졌던 소주 냄새 흥건한 내 기억 속의 낡은 풍경들. 홍상수 영화를 보면 늘 이때의 기억들이 데자뷔처럼 쏟아져 나온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홍상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미 감독이거나 평론가라는 것뿐이다.
사실 '북촌방향'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출연하는 배우마저 비슷한 홍상수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건 내게 떠나고 싶을 때 떠나지 못한 보상심리로 윤대녕의 단편을 읽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준다. 바로 그런 목적성 때문에 나는 반복해서 그의 영화를 본다.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을 먹고, 잠이 오지 않으면 수면제를 복용하듯 그렇게.
대구에서 교수를 하며 한때 영화를 만들던 성준은 서울에 올라온다. 그는 북촌에 사는 선배 영호를 만나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하는데,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다른 사람들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다음 날이라고 추정되는 어떤 날, 영호를 만난 성준은 영호의 후배 여교수와 '소설'이란 이름의 술집에 간다. 종종 술집을 비우는 이 기묘한 술집 여주인은 우연히도 성준의 옛 연인과 닮았다.(2인1역으로 김보경이 연기한다) 영화는 술집 '소설'에서의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며 시간의 다른 흐름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성준은 자신의 옛 연인과 똑같게 생긴 술집 여주인과 짧은 사랑을 나누며 그녀와 작별한다.
그녀와 작별하고 인사동을 내려와 북촌으로 향하는 동안 성준은 '아는 감독'과 '아는 배우'를 우연히 만나고,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자신을 아는 듯한' 음악감독을 우연히 만나며, 자신의 팬임을 자청하는 '모르는' 사진작가 여자를 만나 졸지에 그녀의 카메라에 사진을 찍힌다.
홍상수는 이 영화를 한 남자가 우연히도 같은 장소를 세 번 가는 이야기라고 얘기한 바 있다. 같은 장소에 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이야기라고도 했다. 다양한 매체에서 '차이와 반복'이나 '메타적 현실'이나 '보르헤스적인 시간'이라는 평론의 언어를 얘기하는 동안, 나는 영화에 흘러나오는 북촌의 풍경에 귀를 기울였다.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분명 '시간'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제목은 '공간'(북촌방향)에 대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간극이 말하는 틈새를 들여다보는 것이 꽤 흥미롭게 느껴진 탓이다. 무엇보다 서울의 옛 풍경이 남아 있는 북촌에서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는 일은 어쩐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에 '훼미리마트' 대신 '만물식품'이, '맥도날드' 대신 '다정' 같은 오래된 밥집이 나와서 다행이다.
그렇게 나는 우연한 어떤 날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소설가와 스타일리스트, 전직 영화홍보 담당자와 중학교 동창…. 떠올려보니 '리옹 역'으로 가는 파리 지하철에서 몇 달째 배낭여행 중이던 후배와 만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했던 지키지 못한 약속들과 그 순간의 놀라움과 반가움을 떠올렸다. 소설가로서 가장 기이한 우연은 '아주 보통의 연애'(최근에 발표한 내 단편집)를 읽는 사람을 카페에서 세 번이나 마주쳤던 일이었다. 그건 분명 하루에 세 번씩 다른 카페에 가는 일만큼이나 이상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많이 팔린 것도 절대로 아닌데 말이다. 언젠가 이런 우연을 한 선배에게 얘기했더니 그가 내게 때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럴 땐 수줍음 없이 말을 걸어. 그리고 책에 꼭 사인해 줘. 그런 기억들을 모아두는 건 앞으로 사는 데 엄청 도움이 될 테니까. 보험 드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북촌방향: 홍상수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 대구에서 교수를 하는 전직 영화감독 성호가 서울의 북촌에 올라오면서 벌어지는 일로 유준상, 김상중, 송선미, 김보경이 출연했다. 여자를 꾀는 데 늘 탁월한 기술을 보여주는 홍상수 특유의 '성준' 캐릭터는 유준상이 맡아 열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