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로 스페인 노동자들은 이미 충분한 희생을 했어요. 그런데 뭘 더 희생해야 한다는 얘기죠?"
기자가 "재정 위기로 어려운 스페인의 위기 극복을 위해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묻자 스페인 최대 노동단체인 CCOO(노조연맹) 페르난도 레즈카노<사진> 대변인은 이렇게 되물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오히려 기자가 당황했다. 그는 격앙하지도 못마땅하지도 않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스페인에는 한국처럼 CCOO와 UGT(노동총동맹)의 양대 노동단체가 있다. 이 중 회원 120만명(조합원)을 거느린 CCOO가 UGT(100만명)보다 더 커 스페인 노동계를 대표하고 있다. 마드리드의 CCOO 사옥에서 만난 레즈카노 대변인은 스페인 재정 위기와 22%를 넘어선 실업률의 원인을 "세계 금융 위기로 스페인의 부동산·건설 붐이 주저앉았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이 해고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규직 취업이 힘든, 경직된 노동시장이 문제라는 의견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스페인 노동시장은 절대 경직되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비정규직 비율이 30%가 넘는 등 노동 유연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결국은 잘못된 국제 금융 시스템 문제인데 우파는 자꾸 국제 금융 시스템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법을 찾는다"고 했다.
독일은 2000년대 초·중반 불황으로 고용이 줄 위기에 처하자 노동단체와 정부가 주당 근로시간을 줄이고 정규직 임금을 일부 낮춰 해고를 막고 신규 채용을 독려하는 해법을 내놓은 적이 있다. 레즈카노 대변인은 이에 대해 "이미 스페인 노동자들은 임금과 연금을 동결하고, 공무원들은 연봉이 5%나 깎이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면서 "더 이상의 희생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신 "사회당 정부의 잘못된 경제 정책, 지방정부와 공공부문의 엄청난 비효율과 부패, 세금을 내지 않는 국민(지하경제)이 문제"라며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스페인이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의 노동단체들은 산하 노조들이 내는 조합비 외에도 정부로부터 매년 지원금 수천억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으며, 프랑코 독재 정권 붕괴 이후 민주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중앙 및 지방 정권에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레즈카노 대변인은 "지난 10년간의 사회당 정권하에서 대기업들은 이윤에만 집중하고, 정규직 일자리 창출은 등한시한 채 해외로만 진출했다"면서 "20일 총선 이후 구성될 새 정부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