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조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외국에 나와 어렵게 공부하는 개발도상국 엘리트들을 보니 남편 생각이 나네요."
21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제1회 김재익 장학증서 전달식에서 외국 학생 2명에게 증서를 준 이순자(73)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남편도 젊어서 미국에서 공부할 때 선진국 도움을 받았고, 그 덕에 평생을 조국 경제 발전에 헌신할 수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으로 순직한 김재익(당시 45세)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의 부인이다.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폭탄 테러로 김 수석 등 수행원 17명이 숨졌다.
이 명예교수는 지난해 12월 서울대에 20억원을 기부해 남편 이름을 딴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개발도상국의 뜻있는 학생과 젊은 관료들이 서울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등록금과 생활비 등으로 1인당 연간 2500만원이 지급된다. 장학생으로 선정된 이들은 공부를 마친 후 본국에서 자국 발전을 위해 일하게 된다.
이날 첫 대상자로 선정돼 장학증서를 받은 몽골인 반즈라크 강톨가(27)씨는 "한국의 발달한 무역 기술을 배워 우리나라에 전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부터 몽골 정보통신기획부에서 일하고 있는 공무원으로, 지난 8월 한국에 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통상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한 상거래 시스템을 배우고 싶다"며 "언젠간 몽골이 세계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하도록 만드는 게 내 꿈"이라고 했다.
또 다른 장학생으로 행정대학원에 다니는 도디 몰라나(27)씨도 인도네시아 산업부 공무원으로 3년째 일하고 있다.
이들은 김 수석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강톨가씨는 "김재익 수석이 한국에서 한 것처럼 몽골 경제 발전의 역군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김재익 수석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을 거쳐 1980년부터 테러로 숨질 때까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다.
김 수석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새로운 경제 정책 추진에는 엄청난 저항이 있을 텐데 끝까지 제 말을 믿어 주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대통령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재임 시절 정부 규제 철폐, 물가 안정, 통화 긴축으로 90년대 경제 호황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명예교수는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남편과 함께 유학해 미국 하와이주립대에서 도서관학을 공부하고 귀국,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로 일했다.
이 명예교수는 "생전에 남편은 '우리가 좀 살게 되면 우리보다 못한 나라의 젊은이를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고 했고, 그것이 김재익 장학기금 설립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장학기금 마련을 위해 앞으로 집도 내놓기로 했다. 이 교수는 "때가 되면 실버타운에 들어갈 생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