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리얼 스틸’(Real Steel ·숀 레비 감독)을 ‘로봇액션 영화’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로봇이 나오는 많은 SF영화에서도 좀처럼 못 보던 참신한 재미가 있습니다.
스토리만 놓고 보면 ‘리얼 스틸’은 별로 새롭지 않아 보입니다. 선·악 대결 구도에서는 벗어나, 전직 복서의 재기(再起)라는 ‘감동적’ 드라마를 풀어내고 있지만, 이건 ‘록키(Rocky)’를 비롯한 너무 많은 스포츠 영화들이 반복했던 진부한 스토리입니다. 로봇들의 격투는 ‘트랜스포머’와 닮은 듯하고, 영화 속 아버지와 아들의 가슴 뭉클한 소통은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옛 영화 ‘챔프(The Champ)’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여러 영화들을 섞어놓은 듯한데도 불구하고, ‘리얼 스틸’은 이런 영화들의 재탕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익숙한 요소들의 화학적 결합이 색다른 재미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여러 커피 원두를 섞어 새로운 맛을 내는 블렌딩(blending)처럼, 상승작용을 일으킨 듯합니다.
‘리얼 스틸’을 다른 SF영화와 차별화시킨 건 ‘로봇 복싱’이라는 가상의 미래 스포츠를 설정한 상상력입니다. 로봇끼리 싸우되 그 로봇을 사람이 조종합니다. 기계의 성능과 인간의 기량이 함께 겨루는 것입니다. “사람이 직접 싸우면 무제한의 폭력을 보여줄 수 없어서 로봇이 대신 싸우게 한 것”이라는 극중 설명은, 잔혹 묘사 시비를 줄이면서도 사생결단식 대결의 느낌을 표현하려는 영화적 선택의 이유로도 보입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2020년. 종반부에선 로봇 대결이 온 몸을 전율하게 할 만큼 박진감 넘치지만, 영화 초반 지방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로봇 복싱의 분위기는 이 근미래(近未來)에 대해 갖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살짝 배반합니다. 후줄근한 사내들이 깡통 로봇같은 걸 가지고 와서 야외에서 벌이는 로봇 복싱의 모습은 우리나라 시골 장날 개싸움이나 소싸움처럼 정겨운(?) 풍경입니다. (실제로 '리얼 스틸‘에서 로봇은 버팔로하고도 한번 싸움을 붙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로봇이 ‘들러붙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특징이 ‘리얼 스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빚어냅니다. 인간과 기계가 얽히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버림받은 존재’가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서는 스토리입니다. 주인공인 전직 복서 찰리(휴 잭맨)와 그의 아들 맥스(다코다 고요), 그리고 로봇 아톰 등 셋은 모두 ‘버림받은 존재’라는 공통점을 가졌습니다.
찰리는 과거 복싱 선수 시절엔 세계 랭킹 2위와 12라운드까지 접전을 벌였던 유망주였으나 챔피언 자리에는 오르지 못한 채 24전 19패의 전적만 남기고 은퇴한 사내입니다. 이젠 로봇 복싱 프로모터가 되어 한 탕을 노리며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지만 빚만 지고 사는 초라한 퇴물입니다..
그는 아버지로서도 빵점입니다.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마저 나 몰라라 하고 아내에게 넘긴채 살아왔습니다. 전 부인의 사망으로 아들 맥스를 맡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서도 아들을 돌볼 생각을 하기는커녕, 자신의 처형(妻兄)에게 돈을 받고 아들을 넘기기로 합니다.
그러니 맥스도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아버지도 모른 채 성장했고, 엄마가 사망한 후 아버지를 만났으나 별로 사랑을 받지도 못합니다. 로봇 아톰도 한참 동안을 고철 쓰레기로 버려져 있었으니 그 신세도 맥스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 상처받은 존재들에게 운명을 뒤집어낼 기회를 주는 게 로봇 복싱입니다. 소년 맥스와 ‘나쁜 아빠’ 찰리는 로봇 복싱을 좋아한다는 접점 때문에 소통합니다. 버림받은 소년 맥스가 부품 야적장 흙구덩이 버려진 로봇 아톰을 발견하는 것은 드라마틱합니다. 아마도 맥스는 아톰에게서 자기 자신의 초상을 봤는지 모릅니다.
아톰은 로봇 복싱계의 스타들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G-2’ 타입이라는 구세대 로봇인데다 체격도 작은 편이고 얼굴 표정은 순하디 순합니다. 그러나 스파링 상대로 개발됐다는 이 로봇에겐 주인의 동작을 흉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따라하기’기능이 복병(伏兵)입니다. 왕년의 열혈 복서 찰리가 이 로봇을 조련할수 있는 것입니다. .
로봇 아톰을 세워놓고 찰리는 어퍼 컷, 스트레이트, 훅등 권투의 기본을 시범 보이며 가르칩니다. 찰리의 가슴 속에 잠자고 있던 ‘파이터 DNA’가 다시 꿈틀거립니다. 못다 이룬 꿈을 이뤄보려는 듯 열심히 가르치는 찰리와, 제자 같은 자세로 따라하는 로봇이 그려내는 풍경엔 인간과 기계가 따뜻하게 소통하는 느낌이 절로 묻어납니다.
다져진 실력으로 아톰과 맥스, 그리고 찰리는 로봇 복싱의 중심무대인 '리얼 스틸'에 진출해 놀라운 전적을 쌓아갑니다. 클라이맥스에서 링 위에 있는 아톰을 '따라하기' 기능으로만 조종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링 밖의 찰리가 섀도우 복싱이라도 하듯 혼신을 다해 혼자서 펀치를 날리고 링 위의 아톰이 그 동작 그대로 상대를 난타합니다. 복서로 다시 돌아온 아빠를 아들 맥스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는 대목은 관객들 눈시울도 뜨겁게 만듭니다.
어느 평론가는 '리얼 스틸은 각본이 너무 녹슬었다'며 스토리의 진부함을 지적했습니다만, 이 언급이 무색하게 국내 많은 관객들이 재미있다는 반응입니다. '말초적 할리우드 액션'이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사소한 것들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스필버그 사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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