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존스톤 감독의 ‘퍼스트 어벤져’(Captain America: The First Avenger)는 “과연 재미가 있을까”하며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식 애국주의를 선전하는 영화라는 비판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역겨움이 넘실대는’ 수준은 아니더군요. 그런대로 볼 만한 오락영화였습니다. 물론 슈퍼 솔져는 성조기를 변형시킨 복장을 입고 2차대전 전쟁터를 누비며 만화처럼 ‘나치 악당’들을 쳐부숩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조차도 정색을 하고 ‘미국 만세’를 외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풍자적 톤이 슬쩍 입혀진 듯했습니다.
‘퍼스트 어벤져'는 미국의 만화 출판사인 마블 코믹스가 자기 회사의 만화인 ’캡틴 아메리카'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 회사의 전작 영화인 ’아이언 맨‘이나 ’토르‘에 열광했던 관객들에게 ’퍼스트 어벤져'는 또 한편의 슈퍼 히어로 무비로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2차대전' 소재 영화의 하나로 읽었습니다.
사실 ‘퍼스트 어벤져'를 진부한 슈퍼 히어로 무비로 떨어질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70년전 2차대전이라는 복고적 배경 설정일 것입니다. 1941년, 참전군인 징집이 한창이던 미국에서 브루클린 출신의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나치를 때려부수고 싶어” 몇 차례씩 군에 지원하지만 워낙 몸이 허약해 번번이 탈락합니다. 그런 스티브를 눈여겨 본 과학자가 미 국방부 비밀 프로그램에 스티브를 참여시켜 인간병기로 거듭나게 합니다. 스티브는 소원대로 전쟁터를 누비며 히틀러의 인간 병기인 레드 스컬(휴고 위빙)과 싸우며 미국의 영웅이 됩니다. .
영화의 배경이 2차대전기가 된 것은 원작 만화인 ’캡틴 아메리카'의 설정을 따른 것이긴 합니다. 이 만화가 탄생한 게 2차대전중인 1941년입니다. 국가가 전시 상황에 빠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당대 대중들이 꿈꾸는 영웅상을 빚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회사의 ‘아이언 맨'은 원작 만화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영화화할 때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배경을 바꿨지만, ’퍼스트 어벤져'는 ‘2차대전'을 고수했습니다. 오리지널의 신화를 이어가려는 생각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한 전쟁이자 미국인으로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차대전(1939∼1945)은 미국이 치러낸 온갖 전쟁 중 가장 많은 것을 얻어낸 전쟁이었습니다.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잡고 미국이 세계 정치·경제 체제의 중심에 서는 지배적 국가가 된 결정적 계기도 2차대전입니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들이 모든 전쟁중 유독 2차대전을 영화소재로 줄기차게 끌어들이는 이유는 자국 중심적 이유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2차대전이야말로 숱한 이야기가 샘처럼 솟았던 가장 드라마틱한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수만 년을 살아오면서 치러낸 모든 전쟁 중 이 전쟁 만큼 온 세상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전쟁은 없습니다. 6년간 5천여만 명이 사망한 이 전쟁은 인간의 야만성을 밑바닥까지 드러냈습니다.
민간인 거주지에 대한 폭격, 원폭 투하 등 인류사에서 가장 잔혹한 대량살육전이 모두 2차대전때 처음으로 시작됐습니다. 전쟁은 이 때부터 군인끼리의 대결에서 벗어나 국가력 대 국가력의 총력전으로 바뀝니다. 그러니 영화의 입장에서는 스크린에 담아볼 만한 가장 전쟁다운 전쟁인 것이죠. 조 존스턴 감독이 20여년전 2차대전을 무대로 삼은 '인간 로켓티어'를 내놓은데 이어 또다시 '퍼스트 어벤져'에 같은 전쟁을 끌어들인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퍼스트 어벤져'는 사실적 영화는 아니지만 70년전 세계대전의 분위기가 그럴싸하게 복고적으로 재현돼 있습니다. 그 유명한 ’엉클 샘‘의 모병 포스터가 붙어있는 1940년대 뉴욕 거리, 전쟁의 공포와 ’나치 악마 일당’에 대한 분노가 뒤엉킨 군중들의 분위기….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고 시체가 나뒹구는 최전선 위주가 아니라 거대한 전쟁을 치러내는 나라의 후방 분위기는 다른 영화에서 좀처럼 못보던 부분입니다.
영화 속에서 미 국방성이 슈퍼 솔져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거나, 나치가 역시 비슷한 과학 병기 개발에 몰두하는 것은 물론 픽션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20세기 과학기술로 끊임없이 전술과 장비를 개량했던 2차대전의 양상을 충실히 반영한 부분입니다. 개인화기, 전투기, 첩보 관측 조준 장비의 발명과 획기적 개량이 2차대전만큼 많이 이뤄진 전쟁은 없으며, 병력을 적 후방에 낙하시키는 공수작전의 2차대전때 처음으로 실전도입됐습니다.
’퍼스트 어벤져'는 슈퍼 히어로 무비 치고는 액션의 박력이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치고 부수고 때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좀더 ‘사람 냄새가 진한'영웅의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애초에 스티브 로저스가 국가적 프로젝트를 맡을 병사로 선정된 이유는 그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체격이 빈약하기 짝이없는 약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의로운 마음과 포기하지 않는 집념, 그리고 남을 위해 헌신할줄 아는 정신‘을 제대로 갖춘 청년이었습니다.
미국주의의 프로파갠더냐 아니냐 식의 논란을 떠나 ’퍼스트 어벤져'는 약점 많은 사람이 그 약점들을 이기고 극적으로 일어서는 성공감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만화의 원작인 ‘캡틴 아메리카'가 70여년째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자, 영화 ’퍼스트 어벤져'가 그다지 지루하지 않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