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끝은 뭉툭하고 마디는 불거지고 손등에는 핏줄마저 불끈 솟아 있다. '피아니스트의 손'이라 하면 흔히 떠올리는 섬섬옥수(纖纖玉手)가 아니다. 피나는 연습으로 아픔과 상처가 절절히 밴 영욕의 손이다.
한국 피아니스트 1세대인 한동일(70)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인생의 즐거움을 강조한다. 마주 쥔 손도 부처님처럼 인자한 느낌을 준다. 김대진(49)은 실제 만남에서도 구도자(求道者) 같은 인상을 풍긴다. 손 또한 고요한 가운데 누군가를 인도하는 모습이다. 손가락이 긴 조재혁(41)은 완벽주의자인 동시에 낭만주의자다. 5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3년간 법대로 빠져본 경험이 있는 그는 20대가 되고서야 피아노 치는 게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에 빛나는 손열음(25)은 작지만 원하는 대로 늘어나는 손 덕분에 별명이 '오징어'였다. 벌처럼 톡톡 쏘며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손이 매끄럽다. 신수정(69)의 손은 단연 멋스럽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숙연한 마음마저 들게 하지만 정적이면서도 유려한 움직임이 원숙미를 과시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한동일·신수정·이경숙(67)·김영호(55)·김대진·백혜선(46)·박종훈(42)·조재혁·박종화(36)·임동혁(27)·손열음·조성진(18)의 손이 흑백사진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작가 현효제(32·Rami Hyun)씨가 지난달 초부터 이들의 집이나 연습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손만 근접 촬영한 것이다. 거리 풍경, 얼굴 등을 찍어온 현씨가 누군가의 손에 초점을 맞춘 건 이번이 처음. 경기도문화의전당 관계자는 "각도를 달리해 새 이미지를 끌어내는 작풍이 좋은 평가를 받아 촬영을 제안했다"고 했다.
첫 피사체는 박종훈의 손이었다. 현씨는 "피아니스트의 손이라 예쁠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퉁퉁하고 투박한 게 내 손과 다를 것 없더라"고 했다. 연주자들도 김대진을 빼고는 손을 찍는 게 처음이라 했다. 김영호는 촬영 전 "손톱 손질이라도 해둘 걸"하며 웃었다. 현씨는 "손가락을 펴고 주먹을 쥐고 깍지를 끼는 동작에서 그 사람의 성품과 고뇌와 감성이 묻어나왔다"고 했다.
손 사진은 13일부터 열리는 '피스(Peace)&피아노 페스티벌'에서 전시되고 이들 연주자들이 출연하는 공연 '24 Great Hands'도 함께 열린다. 국내 최초로 피아니스트만 모여 정교한 연주 테크닉과 예술적 깊이를 선사한다.
☞'24 Great Hands' 공연은
한동일·신수정·이경숙·김대진·손열음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차르트의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2번',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한다.
백혜선·임동혁·조성진은 각자 리사이틀에서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과 슈만의 '아라베스크',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등을 선보인다.
20일까지 경기도문화의전당 (031) 230-3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