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만 따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외모가 별로라거나 돈이 없다고 해서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성격이 좀 독특하다고 해서 가장 가까운 핏줄에게조차 이해를 못 받는 것 같기도 하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가 만든 영화 '헤어드레서'의 주인공 카티(가브리엘라 마리아 슈메이데)도 세상이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여자는 아니다. 그런데 이 여자, 자신을 밀어내려는 세상을 넉넉한 덩치로 그냥 확 안아버린다.
카티의 몸은 '넉넉하다'는 수식어로는 표현이 부족하다. 100㎏이 족히 넘어 보이는 그는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의자엔 엉덩이를 구겨 넣어 앉아야 한다. 바람난 남편을 떠나 딸과 고향으로 돌아온 카티는 헤어드레서로 일하려고 한다. 그러나 미용실 원장은 면접을 보러 온 그에게 "헤어드레서는 아름다움을 다루는데 댁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는다. 부당한 대우에 화가 난 카티는 아예 미용실을 열기로 작정한다.
여성 캐릭터의 심리를 밀도 있고 재치 있게 그릴 줄 아는 되리 감독의 장기가 잘 살아난 영화다. 감독의 전작(前作)인 '파니 핑크'(1994)가 절로 떠오른다. '파니 핑크'의 파니는 카티보다 젊고, 가진 것도 많고, 더 날씬하지만 역시나 카티처럼 세상에서 조금씩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파니나 카티 모두 세상에 뛰어들어 자신을 당당히 내보이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관객은 새로운 세상을 구축한 이 여성들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
영화에는 독일 베를린 내 자치구 마르차의 낡아 빠진 아파트와 백화점, 이민자들의 아지트 등이 꾸미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나오고 잠깐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연기한 것 같지가 않다. 영화는 가정 폭력과 성(性)차별, 실업과 이민자 문제까지 독일의 사회적 현안들을 골고루 담았다. 되리 감독은 정색하지 않고 이런 난제들을 자연스레 녹였다. 특히, 독일에 불법 입국하는 베트남인들을 희화화하지 않으면서도 유쾌하게 다룬 데서 감독의 남다른 감각과 내공을 엿볼 수 있다.
남성 관객은 조금 섭섭할지 모르지만 되리 감독은 여성 관객을 더 편애하는 것 같다. 여성 관객은 카티를 보고서 '어쩐지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카티가 뒤에서 꼭 안아주는 것 같은 위안까지 받는다. 영화는 그녀의 품만큼이나 푹신하고 몽클몽클하다. 지난 4월에 열렸던 서울 여성국제영화제의 개막작. 1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 이것이 포인트
#장면
지하철 안에서 한 젊은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카티의 원피스 뒤쪽에 달린 지퍼를 내려준다. 카티는 살 때문에 혼자 지퍼를 내릴 수 없어 집에 들어가기 전에 남의 도움을 받아 지퍼를 미리 내려 놓는다.
#대사
“남편은 뭘 하세요? 보증을 서 주실까요?”
“남자가 오면 아내 직업도 물어봐요?”(대출받으려는 카티와 은행 직원 간의 대화)
#이런 분들 보세요
외모나 학벌 등 세상이 세워놓은 기준에 못 미친다고 주눅 든 분들. 영화를 보면 세상이 밉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