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출몰하는 유령이 있다.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정치이념이다. 지난 대선 언저리에도 여·야, 좌·우를 넘어 화젯거리였다. 요사이 보수우파의 관심이 다시 커지는 걸 보니 다음 대선이 다가옴을 실감하게 된다.
공화정의 이상은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 정치사상이 보듬어온 아름다운 꿈이다. 건강한 시민공동체를 향한 오랜 열망은 자유, 법치, 평등, 참여, 시민적 미덕이라는 공화주의의 핵심가치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익숙한 한국의 보수가 새삼 공화주의에 눈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과잉민주화'에 대한 우려라고 생각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사적 이익집단의 무분별한 권리주장이 이제 비등점을 넘어 오히려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작금의 '갈등공화국'은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위해 공화(共和)하는 시민의식의 결여에서 기인한바, 선진민주화의 요체는 시민적 미덕의 함양이라고 주장한다.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자제해야 한다"는 토크빌(Tocqueville)의 역설을 한국에 적용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의 공화주의에는 공감 가는 만큼이나 아쉬운 부분도 많다. 우선 시민적 미덕은 독립변수가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종속변수이다. 나아가 기득권이 지켜야 할 윤리가 실종된 우리 실정에서 일방적으로 민도(民度)를 탓한다면 고루한 훈민(訓民)의 논리나 지배계층의 불순한 책임전가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도의 인사치레로 넘어서기 어려운 대중적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보수의 공화주의가 앞서 고민해야 할 현실이 있다. 바로 사회제도와 시민연대(連帶)의 문제다. 토크빌도 시민의 자질과 능력이 미더워 배심재판 제도를 옹호한 건 아니었다. 사법절차에 대한 국민참여의 결과로 균형 잡힌 시민의식이 형성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효율성과 평준화의 양극단밖에 모르는 우리 사회제도는 어떤 시민적 미덕을 배양하고 있을까.
또한 이성적이고 질서 있는 공적 참여는 시민 사이의 끈끈한 동료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공공선(公共善)의 이름으로 생판 모르는 이웃과 타협하거나 경쟁자에게 양보할 도덕군자는 흔치 않다. 법치질서, 공적 참여 그리고 시민적 덕성이 선(善)순환하는 공화주의는 사회적 연대의식을 먹고 자란다. 민족이나 국민으로서의 일체감이 예전만 못한 다원화 시대에 과연 어떤 공동체적 가치가 살아남아 우리를 하나 되게 할까.
우리 시대 공화주의의 적(敵)은 사회연대를 갉아먹는 극심한 양극화와 그 대물림이다. 동네 구멍가게까지 대기업에 내주는 나라, 철밥통 물려주자고 노조마저 서민을 울리는 사회에 시민적 연대감이 싹틀 리 만무하다. 대학등록금 논란의 밑바닥에는 계층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걷어찬 대학과 이를 방조한 국가에 대한 배신감, 미래를 저당 잡힌 청춘들이 느끼는 절망감이 짙게 배어 있다.
미덕은 제도가 낳고 시민은 공화국이 만든다. 공화국은 민주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나라다. 그래서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래 헌법 1조는 한결같이 선언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 변함없는 국시(國是)의 완정(完整)에 건강한 시민을 희구하는 공화주의가 대선을 내다보는 보수우파에게 던지는 우리 시대의 화두가 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