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은 1904년 쓰촨성 광안(廣安)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네 살에 가족을 따라 충칭(重慶)으로 이사간 뒤 고향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1987년 덩이 쓰촨성에 현지 지도하러 갔을 때 고향 사람들이 잠시 들러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내 고향은 광안이지만 쓰촨성 전부이기도 하니까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중국 언론은 "고향에 사사로운 정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13억 전체의 지도자가 됐다"고 했다.

▶덩은 자식들의 고향 방문도 막았다. 그는 1997년 세상을 뜰 때 생가를 보존하지 말고, 시신은 화장해 바다에 뿌리라고 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1991년부터 생가를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해왔다. 해마다 5만 명 넘게 관광객이 몰려 지금도 고향 사람들 살림에 보탬이 된다.

▶'중국의 부상(浮上)'이란 책을 쓴 윌리엄 오버홀트 미국 하버드대 선임연구원은 "덩이 한국의 발전전략, 즉 '박정희 모델'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평가해왔다. 덩은 1992년 남부 지역을 돌면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싱가포르·대만·홍콩)을 경제·사회적으로 따라잡아야 한다"며 경제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덩샤오핑과 박정희를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와 함께 아시아의 3대 지도자로 꼽았다.

▶덩과 박은 경제 개발에 성공했지만, 그 성공의 결과로 출현한 중산층의 민주화 요구에 맞닥뜨렸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둘은 키는 작지만 당찬 점도 닮았다. 어릴 때 덩은 아버지가 계율 100가지를 정해 가족이 전부 따르라고 하자 홀로 "낡아빠진 계율"이라며 반발했다. 1917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초등학생 때 하루 40리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겨울엔 얼어붙은 도시락을 먹다 자주 체해 키가 자라지 않았지만 덩치 큰 아이들과 씨름을 하면 이길 때까지 버텼다. 두 사람은 반공주의자와 공산당 지도자로 이념이 갈렸을 뿐 우선 국민을 배불리 따뜻하게 만들겠다는 같은 목표를 지녔다.

▶박정희의 고향 구미시와 덩샤오핑의 고향 광안시가 어제 자매결연을 맺었다. 두 도시는 서로 상대 쪽 지도자를 조명하는 학술 행사와 사진전도 연다고 한다. 국민에게 '밥' 걱정을 덜어준 대신 '법' 역시 무섭게 휘두른 두 지도자의 고향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묘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