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인교동(仁橋洞)은 허름했다. 반백년 공구(工具)골목에 사람과 차가 뒤엉켜 있다. 그 땅에서 갑부(甲富)가 줄줄이 나오는 게 신기롭다. 사람들 말은 이랬다. "예전에 개천이 흘렀어요. 풍수사들이 부(富)가 모이는 곳이래요."

1938년 한 청년이 거기 200평 터를 잡았다. 4층 목조건물에 국수기계 네대로 시작한 '별표국수'가 대박 치더니 조선양조를 손에 넣었다. 그 별표가 삼성(三星), 그 청년은 이병철(李秉喆) 삼성창업주다.

50년을 살아온 공구 골목을 최영수는 오늘도 걷고 있다. 사진 오른쪽의 노인을 바라보며 최 사장은“내가 어린 시절 공구 행상을 할 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셨던 분”이라고 했다.

1997년 철거된 삼성 창업 터를 지금 이름 특이한 회사가 에워싸고 있다. '크레텍 책임'. 재계가 국내 최대이면서도 무명이나 다름없던 이 회사를 주목한 건 작년 10월이다. 이병철 탄생 100주년 기념공원을 만들려는데 땅이 부족했던 것이다.

대구시가 "삼성 소유 땅(115㎡)만으론 부족하다"고 하니 크레텍 책임은 아무 대가 없이 자기 땅 25평을 내놓았다. 큰소리쳐도 될 법한데 오히려 사장 최영수(崔英洙·67)는 감사의 변(辯)까지 바쳤다.

"1991년입니다. 당시 부근에 세(貰)로 철물점을 하고 있었어요. 주인이 어찌나 까다롭게 굴던지 다른 곳을 찾아야 했어요. 석 달쯤 뒤에 이 땅을 샀어요. 흥정도 않고. 그 뒤 연 매출이 10배 늘고 직원도 70명에서 300명이 됐습니다."

오너와 사풍(社風)이 회사 이름 못지않게 특이했다. 중졸(中卒) 학력에 공구 골목 터줏대감은 매일 아침을 PT체조로 연다고 했다.

―왜 땅을 내놓을 생각을 했습니까.

"언젠가 서울의 삼성 본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귀퉁이에 다른 건물이 있는 게 볼썽사납더군요. 이 회장 기념공원이 생기면 그 기(氣)를 받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땅이 부동산 시세는 높은데요.
"시세대로라면 평당 3000만원은 받았겠지만…, 제가 그런 거 싫어합니다."

―삼성에서 고맙다고 하던가요.

"인사 받은 적 없고 이건희 회장 따님이 기념공원 공사 진행 상황을 보러 왔다가 우리 회사 간판 보고 '무슨 회사 이름이 저렇냐'고 했다더군요."

―왜 매일 아침 PT체조를 합니까.

"제가 1967년 10월 30일 입대했어요, 해군(海軍)으로. 1969년 6월 9일로 기억합니다. 상병 때 UDT(수중폭파대)에 지원했어요. 15기(期)였으니 아마 제대로였다면 고(故) 한주호 준위의 7년 선배쯤 됐을 겁니다. 그런데 교육받던 중 포기했어요."

―힘들었겠지요.

"여동생이 셋 있고 부모님도 육십 가까운 연세셨습니다. UDT가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길이긴 해도 (북파처럼) 다른 위험한 곳에도 많이 가야 했습니다. 장기복무를 생각하고 지원한 건데 사병(士兵)으로서의 한계도 있었고요."

―UDT는 그냥 관두겠다면 내보내 줍니까.

"'빳따' 100대 맞고 나왔지요. 70~80대까지 세어 봤는데 그 뒤론 기억도 안 나요."

―그때 UDT 못 된 게 한이 돼 직원들에게 매일 아침 8시 20분부터 PT체조를 시키는 겁니까, 여직원들까지.

"PT체조하면 장점이 많아요. 몸도 풀어주고 아침을 상쾌하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저도 매일 하는데요, 뭘."

―철공소에 다니다 입대하셨지요.

"제가 1남3녀의 맏이인데 아버지가 정미소를 하다 실패해 대구로 나왔어요. 집안이 어려웠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사글세 방 한 칸에서 온 식구가 살았으니까요. 비 오면 물이 줄줄 샐 정도였습니다. 중학교 마치고 고교 진학은 엄두도 못 내고 철공소 가서 3년간 일했지요."

―철공소를 3년 만에 그만뒀습니다.

"하필 아버지가 같은 공장에 다닌 겁니다. 그러니 동료들의 화살이 제게 돌아왔어요. '왕따'를 당하게 된 거죠. 둘이 번다고 집안 사정이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화투를 좋아했거든요."

"나는 책임보장이다!"

나이가 들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못 배운 것은 한(恨)이다. 최영수는 "당시 UDT엔 중졸도 드물었다"고 했지만 털어놓는 사연의 중간 중간 감정이 엿보였다. 군 복무 중 검정고시 공부도 했고 제대 후 서울로 와 원양어선 간부시험 준비도 했다고 한다.

―그 좋은 기회를 왜 포기했습니까.

"포기한 게 아닙니다. 사모아 같은 곳에서 참치 잡는 꿈에 부풀어 검정고시 공부 중단하고 부산에 내려갔는데 열흘도 안 돼 부모님이 쫓아왔어요. 군대에서 39개월 동안 배 탔는데 더 이상은 못 탄다고. 대구로 끌려갔지요."

―대구에 돌아와선 뭘 했습니까.

"공장에 돌아가긴 싫고, 그래서 시작한 게 공구 행상(行商)이었습니다. 예전에 대구 동서남북에 버스 주차장이 있었어요. 당시엔 운전사와 뒤에 조수(助手)가 탔는데 버스가 구닥다리였잖아요. 자주 고장 나니 길에서 멈추면 운전사나 조수가 직접 고쳐야 했습니다. 공구 수요(需要)가 꽤 있었던 셈인데 전 직접 고객을 만나러 간 거지요."

―그리곤 얼마 안 가 점포를 열었습니다.

"행상을 하면서 다른 분 점포의 5분의 1 정도를 빌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제 장사만 잘되고 점포 빌려준 분 장사는 안 되는 겁니다. 주인이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죠. '나가라'고 하더군요. 짐을 꾸리는데 마침 옆의 점포 주인께서 '최군 점방 구하나'하고 묻더군요."

―그 점포가 지금 '크레텍 책임'의 전신인가요.

"전 물건 팔 때 거짓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가격도 높게 불렀다가 깎아주는 식 말고 받을 만큼 받자는 주의였어요. 자전거 타고 다니며 '전 책임을 보장합니다'하고 말하고 다녀 별명이 '책임보장'이었어요. 점포 이름을 지을 때 여러분이 그러시더군요. '당신 이름이 책임보장인데 무슨 다른 이름을 지으려 하느냐'고요."

―진짜 책임을 다했습니까, 평생?

"실수할 때도 있었지요. 한 손님이 제가 판 물건을 가져와 홱 집어던지며, '이게 무슨 책임보장이야!'하고 항의한 적도 있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었어요."

―결혼할 때 에피소드가 있었다면서요.

"아버지가 '환갑 때는 며느리 밥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성화가 대단했어요. 사귀는 아가씨는 없는데 재촉은 하고, 그래서 매일신문에 이틀 연속 광고를 냈지요. '숯구이 검둥이 총각 바보온달의 아내 될 자는 이 땅에 없는가'라고."

―숯구이 검둥이 총각이라뇨?

"공구 행상 외에 고철(古鐵) 장사도 했거든요. 마진이 꽤 괜찮았어요. 자전거로 공구 끌고 다니고 고철 싣고 다니다 보니 항상 온몸이 시커먼 게 숯덩이 같았거든요. 제가 한때 자전거에 284㎏가량의 공구를 싣고 다닌 적도 있어요. 제 장딴지 한번 만져보실래요, 축구선수 못지않아요. 게다가 공부를 못했으니 바보온달이잖아요. 그 카피는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지원자가 많이 왔겠네요.

"5~6일간 수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전화가 많이 와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한 30명 정도 만났을 겁니다. 결국 당시 동양화물이라는 제일 큰 물류회사의 경리와 결혼했죠,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 한눈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기회가 된 위기

잘나가던 70년대 중반 최영수의 일생에 큰 사건이 생겼다. 삶의 터전 버스정류장이 옮겨간 것이다.

―매출이 확 떨어졌습니까.

"주차장이 이사 간 겁니다. 원래 자리에서 2㎞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손님이 하루아침에 3분의 2가 없어졌어요. 그곳으로 따라갔지만 터가 안 좋았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그때 느낀 건데 긍정적인 마인드가 참 중요한 겁니다. 변화가 오면 돌파구를 찾으면 되는 겁니다. 그때 중요한 손님을 만났어요. 김천에 사는 분이었는데 공구를 사러 왔대요. 머릿속에서 뭔가 번뜩했습니다. '아! 이젠 대구 시내뿐 아니라 구미, 김천, 상주, 영주, 점촌, 예천까지 나가면 되겠구나'하고."

―이른바 블루오션을 찾은 거군요.

"어찌 보면 소매상에서 도매(都賣)로 변신한 거지요. 주차장이 이사했을 땐 당황했지만 그 일이 없었으면 아직도 소매상에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사업 규모가 확 커졌다는 뜻이겠군요.

"공구납품업이 도매업으로 확장되더니 대리점을 개설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됐습니다. 공구 생산과 소매를 이어주는 유통망이 국내에서 처음 생긴 거지요. 지금 저희가 취급하는 국내외 브랜드가 1000개에 품목은 10만개가량입니다. 전국의 도소매 고객이 4100개사가 넘고요. 작년 매출액이 2520억원, 순익이 110억원이었는데 올해 매출 목표가 3000억원입니다."

―국내 시장 점유율은요.

"2위가 800억원, 3위가 200억~300억원쯤 됩니다. 문제는 그룹 계열사들이 공구도매업에 뛰어들고 있다는 겁니다. 요새 대기업이 떡볶이 장사까지 한다는 말 있잖아요? 이 분야도 마찬가집니다."

―국제적으론 어떻습니까.

"아직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죠. 미국 1위 업체의 경우 다루는 품목이 50만개고, 일본은 20만개 정도거든요."

―공구가 그리 많습니까, 처음 듣습니다.

"크게 전문가용 프로페셔널 툴과 DIY 툴로 나뉘고 그 안에서 절삭, 측정, 에어, 용접 등으로 나뉘고 다시 사이즈별로 다르니까요. 흔히 공구는 독일, 일본제가 좋을 것 같은데 다 옛날 얘깁니다. 지금은 중국, 대만, 한국과 별 차이가 없어요."

―앞으로는 공구의 소비가 줄어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공구 수요는 계속 느는 추세입니다. 유통업이 화려해 보이진 않지만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선 공구 값이 부르는 게 값이었거든요. 그래서 저희 회사가 처음 표준가격제를 실시하고 그 가격을 공개했어요."

―신동우 화백의 만화를 마케팅에 사용한 적도 있다면서요.

"서울로 무조건 찾아가 만화광고를 부탁드렸죠. (그림을 보여주며) 만화 옆에 글 보이죠? '강력하고 정밀한 드라이버가 없을까 하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릅니다'라는. 정말 당시엔 그랬어요."

적금은 '댐'

험한 공구 골목에서의 50년은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부는 세월'이었다.

―인생의 돌부리도 많았죠.

"1979년부터 세 차례 세무조사를 받았어요. 처음 당할 때는 정말 머리가 빙빙 돌더군요. 그 뒤론 모범납세자상을 받을 정도로 철저히 관리했어요. 1982년에도 주요 거래처가 줄부도가 난 적이 있습니다. 제 재산의 4분의 1 정도가 그때 날아갔습니다. 1997년 IMF 때는 더 심했죠. 부도난 업체가 70개가 넘었으니까요."

―그렇게 풍파를 맞고도 망하지 않고 버틴 게 용합니다.

"비결이라면 비결이랄까, 제가 어음을 쓰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었어요. 받기는 하지만 발행은 안 했거든요. 그리고 적금(積金) 덕을 정말 톡톡히 봤어요."

―적금?

"제가 당시만 해도 적금통장을 10개 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 찾아서 갚으면 다시 갚아야 할 돈이 생기고, 다시 적금 타서 갚으면 또 반복되고. 마지막 통장 찾고 나니 어음부도 사태가 끝나더군요. 전 적금을 댐(Dam)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래요."

―거래업체도 그렇지만 이런 업종에선 용인술(用人術)도 중요하죠?

"인복(人福)이 있어서인지 다른 업체에서 적용 못 하는 사람들이 저하고는 잘 지냈어요. 예를 들면 바코드 도입 때 큰 역할을 한 분이 공군 장성(將星) 출신입니다. 전 남의 지혜를 적극적으로 빌려 쓰는 게 진짜 경영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중용되다 배신하는 분들도 있겠죠.

"당연히 있죠.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회사를 나가 다른 회사에 가면 꼭 파산지경까지 몰고 가더군요. 정말 희한해요."

―요즘은 젊은이들의 이직도 잦습니다. 얼마쯤 배우면 독립할 수 있습니까.

"예전처럼 표준화가 되지 않았으면 오래 걸리죠. 보통 10년, 적어도 5년쯤? 지금은 제가 카탈로그도 만들었으니 2년 정도면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카탈로그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제가 저 카탈로그를 만든 게 1995년입니다. 처음엔 3개월에 한번 만들다 두 달에 한번, 지금은 월간지가 됐어요. 업계에서 인기가 많으니까요."

―그런데도 직원들을 잘 챙긴다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제 지갑 한번 보여 드릴까? (낡고 해진 지갑을 도로 넣으며) 전 양복 한벌로 한 계절 보냅니다. 잠도 시간 날 때마다 자고요. 대신 직원들에겐 할 수 있을 만큼 합니다. 큰 것보다 작은 정성, 그런 게 더 소중한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