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피, 피, 엘, 이. 애플(Apple)."
앵두 같은 작은 입술들이 내 입을 따라 오물오물 움직인다. 요 녀석들 얼마나 잘하는지, 금세 집에 가서 냉장고 문을 확 열어 사과를 가리키며 엄마에게 묻는단다. "엄마, 사과가 영어로 뭔지 알아? 애플이야, 애플. 우리 할아버지 티처(teacher)가 알려줬어."
'노랑머리 젊은 원어민 영어 선생님이 판치는 요즘 웬 할아버지 토종 영어 선생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엄연한 영어 선생님이다. 그것도 우리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스타 선생님'이다.
지금은 아이들 앞에서 넉넉한 웃음을 짓는 할아버지 영어 선생님이지만 젊은 시절 나는 날아오는 총알 앞에서도 꿈쩍 않는 용맹한 군인이었다. 군인의 길은 내겐 운명이었다. 18세에 학생 신분으로 6·25전쟁에 혈서(血書) 지원했다. 아직도 내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는 그때 도려낸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린 나이에 목격한 전쟁의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이 땅에서 되풀이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1953년 전쟁중에 육사에 입학해 1983년 백마부대 부사단장으로 전역할 때까지 30년간 군인으로 살았다.
영어와 인연을 맺은 건 1959년 육군 부관학교의 군사영어반을 졸업하고 통역장교가 되면서였다. 이후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 최초의 유도탄 부대 창설 요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2년간 근무하면서 본토 영어를 익혔다. 당시 나는 미군의 유도탄 교육 내용을 영어로 동시통역해 우리군 관계자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군대 내에서 통역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영어의 달인'으로 통했다. 영어를 잘해 특이한 경험도 많이 했다. 미국 남성과 한국 여성의 국제결혼 식장에서 동시통역으로 주례를 선 적도 있다. 1972년엔 맹호부대 60포병대대 대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접전 속에서 우리 부대원 500여명 중 단 한명도 목숨을 잃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봐도 기적 같은 일이다.
한평생 군에만 있을 것 같았던 내게도 전역(轉役)의 순간이 왔다. 1983년 군을 나와 운 좋게 한 대기업에서 상임고문으로 7년간 일했다. 새로운 일이라 흥미로웠지만 먼 미래를 보고 긴 호흡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찬찬히 생각해봤다. 잘하는 건 군대에서 배우고 익힌 '영어'였고, 좋아하는 건 '아이'였다.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숱한 아이들의 희생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편이다. 군대에 있을 때도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다. 1970년대엔 박봉을 털어 학용품이 부족한 울릉도 학생들에게 가방을 보내는 일을 했다. 내 평생 반려자인 아내가 어린이집을 운영해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된 측면도 있다.
영어와 아이, 이 두 가지를 인생 2막의 목표로 삼았더니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겠다는 목표가 자동적으로 설정됐다. 매사 완벽한 성격이었기에 허투루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집사람에게 묻어가는 것 아니냐는 소리는 더 듣기 싫었다. 1985년 쉰셋의 나이에 교육대학원에 들어가 '유치원 교사의 자질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고 교원 자격증도 땄다. 최고령에다 군인 출신 학생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교사로서 제대로 된 요건을 갖추고 1980년대 말 아내가 하는 어린이집에서 영어 선생님을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 수업은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아이들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좋아한다. 손자 손녀를 따라온 노인들이 교실 뒤에 앉아 알파벳을 따라 하기도 한다. 여느 유치원 영어 수업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것을 익히며 아이 같은 미소를 짓는 내 또래 노인을 보면 보람을 두 배로 느끼게 된다.
요즘 사람들이 나를 보고 '목사님 얼굴'이라고 한다. 아이들의 티없이 맑은 웃음이 내 인상을 바꿔 놓았다. 내가 군인이었다고 말하면 대부분 화들짝 놀란다. 목숨을 함께했던 전우들도 지금의 내 일상에 놀란다.
인생의 1막을 조국을 지키는 데에 바쳤다면, 인생 2막은 조국의 미래인 어린이를 위해 바치고 있다. 나의 여명(餘命)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이 땅의 어린이를 위해 살다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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