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숨은 그림처럼 도로 아래로 몸을 웅크린 건물. 도로 위로 보일 듯 말 듯 드러난 나무 외벽만이 존재를 슬쩍 알려준다.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면에 딱 달라붙어 발아래 드넓은 청평호를 조망하는 듯한 형세다. 경기도 가평 청평댐 입구에서 75번 국도를 타고 10㎞ 정도 가면 나오는 갤러리 하우스 '류미재(流美齋)'는 자연 속에서 숨바꼭질하는 것 같은 건축물이다. 이달 초 건축물로서는 한국 최초로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iF 디자인상 커뮤니케이션 부문상을 받았다. 지난해 아시아 태평양 스페이스 디자인 어워드 '엑설런트상'도 수상했다.

갤러리‘류미재’의 미덕은 자연과의 조화, 안과 밖의 소통이다. 이를 위해 건축가는 내벽과 외벽에 같은 자연 소재를 적용했다.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나무 외벽 안쪽의 거실 벽엔 나무를 썼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돌벽 안쪽 실내 벽은 겉과 똑같은 돌벽으로 만들었다.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 갤러리를 설계한 최시영(55·Axis 대표)씨는 대뜸 "없는 것 같은 건물"을 얘기했다. "알고 지내던 건축주(IT 사업가 류미재)가 같이 땅 좀 보러 가자고 해 와봤더니 급경사면이라 땅은 안 보이고 하늘이 담긴 청평호만 보이더라. 그 순간 자연 앞에선 건물조차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소박한 건축물을 지으려 했다."

최씨는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 겸 건축가.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파주의 타운하우스 헤르만하우스, 부산 퀸덤 등의 실내를 디자인했고 인천공항과 평택 '북시티'의 아트 디렉터를 맡았다.

갤러리 뒤편 돌벽에 기댄 최시영씨. 돌벽은 건물이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만든 장치다.

자연을 향한 배려가 곳곳에 숨 쉰다. 3층짜리 건물을 도로 위 지상(地上)으로 짓지 않고 지하에 파묻은 것처럼 경사면에 밀착된 형태로 설계했다.

사람들이 길에서 호수를 내려다볼 때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연의 연장선이라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내부와 외부의 소재를 통일했다. 뒤쪽 외벽에 적용한 돌담이 내벽에도 쓰였다. 실내의 나무 천장을 외부 테라스 위까지 연장해 공간이 넓어 보이게 했다.

건축주의 이름을 한자만 바꿔 만든 류미재라는 갤러리 이름처럼 '아름다움이 흐르는(류미·流美)' 공간이 연출됐다.

(사진 위)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에 붙어 있는 것 같은 갤러리. 건물 군데군데 그대로 살려둔 소나무가 보인다. (사진 아래 왼쪽)거실 천장 높이를 7.6m로 만들어 창밖으로 청평호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게 했다. (사진 아래 오른쪽)외벽과 같은 돌벽으로 마감한 계단 옆 실내벽.

건축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뜻밖에 소나무였다. "건축주가 연리지(連理枝·두 그루의 나무가 한 몸으로 붙어 자라는 형태) 소나무를 훼손하지 말아달라 간곡히 주문했다. 공사 기간은 두 배로 걸렸지만 결과적으로 소나무가 내부와 외부를 소통해주는 연결 고리가 됐다."

건물의 원래 용도는 별장이었다. 심한 폐소공포증 때문에 도시에 살기 힘들었던 건축주가 탁 트인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별장을 의뢰했다. 통유리창으로 휘감은 전면과 천장 높이가 7.6m나 되는 개방감 있는 거실이 탄생한 배경이다. 그런데 지난해 건물이 완공되고 3개월 만에 집에서 미끄러져 크게 다친 건축주가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혼자만 보는 건 죄 같다.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다"며 집을 갤러리로 바꾸겠다 했다. "뜬금없이 갤러리로 바꾸겠다 해서 처음엔 당황했다. 집과 가구는 그대로 둔 채 예술품을 전시해 건축과 예술을 함께 즐길 수 있게 하겠다 해서 찬성했다." 그렇게 집처럼 생긴 특이한 갤러리 하우스가 탄생했다. 침대 위에 작가 김옥지의 미술품이 걸려 있고 뒤뜰에 조각가 정대현의 작품이 놓여 있는 식이다. 관람객은 하루 30명만 예약해 받는다. 일반인도 입장 가능하다.

최씨는 자식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건물의 진화를 바라본다. "건축물은 어떻게 짓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이느냐도 중요하다. 한 사람을 위해 만든 건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니 보람을 배로 느끼게 된다." 갤러리 문의 (031)585-8765